[토요일에 만난 사람]“두 손을 잃었지만… 고전번역의 기쁨 거머쥐었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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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장 이강욱 씨

이강욱 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장이 그의 집이자 연구소인 경기 양평군의 서재에서 14년간 번역한 일성록 34권을 보여주고 있다(1권은 곧 발행). 이 중 19권이 단독 번역. 두 손을 잃고 방황하던 그는 머리와 입과 발을 이용해 평생을 투자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고 다짐했고, 고전 번역은 그의 꿈을 이루게 해줬다. 양평=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이강욱 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장이 그의 집이자 연구소인 경기 양평군의 서재에서 14년간 번역한 일성록 34권을 보여주고 있다(1권은 곧 발행). 이 중 19권이 단독 번역. 두 손을 잃고 방황하던 그는 머리와 입과 발을 이용해 평생을 투자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고 다짐했고, 고전 번역은 그의 꿈을 이루게 해줬다. 양평=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기자로 살다보면 ‘글빚’이라는 걸 지게 마련이다. 누군가의 원망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호의적인 글도 빚을 만들 수 있다. 꽤나 시간이 흘러 기사의 주인공과 재회하는 경우다. 주인공의 ‘그 후’를 다시 써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이강욱(李康旭·55) 씨는 후자다. 두 달 전쯤 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 씨와 처음 만났는데 그가 아주 오래전에 내가 쓴 기사를 얘기하더라는 것이었다. 꼭 22년이 된 기사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곧바로 기사를 찾아봤다.

1993년 1월 4일자 사회면에 실린 인터뷰 기사의 요지는 이랬다. “이 씨의 꿈은 육사 입학이었다. 그러나 키가 작아 지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군산 J고교를 자퇴하고 방황했다. 그러다가 부산의 한 전자제품 하청공장에서 일하던 중 동료의 실수로 유압프레스에 두 손을 잃었다. 스물세 살 때였다.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재활훈련을 하며 재기를 다짐했다. 갈고리형 의수에 붓을 끼워 서예연습을 하는 등 악착같이 노력한 끝에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어 공인노무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전부 주관식인 2차 시험에서 신체의 한계를 느끼고 또다시 좌절했다. 그리고 결심한다. 호구지책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머리 입 발을 이용해 평생을 투자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자신이 만든 ‘은대학당’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강욱 연구소장.
자신이 만든 ‘은대학당’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강욱 연구소장.
이 씨는 한학(漢學)에 평생을 바치기로 했다. 그는 이미 한학자를 사사(師事)하고 서당까지 열어본 경험이 있었다.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1990년 4월에 첫 도입한 독학사(獨學士)시험에 도전한다. 독학사란 혼자서 공부해 4단계 시험에 합격하면 학사학위를 주는 제도. 그는 독학사에 한학과가 없어 관련학과인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해 1993년 1월 학과수석으로 제1회 독학사 학위를 받는다. 기자가 이 씨를 만난 것은 학위를 받기 직전에 그가 살고 있던 전주에서였다. 내 기사는 그의 외로운 성취에 대한 작은 응원이었던 셈.

기사의 맨 마지막은 “이 씨는 앞으로 성균관대 유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고 되어 있다. 그 꿈은 어떻게 됐을까.

이 씨가 단독 번역한 ‘조선조 승정원의 업무규정집 은대조례(2012년)’는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은대(銀臺)는 승정원의 별칭).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유교경전학과에서 ‘충서(忠恕)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정보화사업’과 ‘조선왕조실록 대국민 온라인사업’에 참여하였으며, 현재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홍재전서’ ‘일성록’ 번역에 참여하였고, 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www.eundae.com)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 재학하며 성균관 부설 한림원 학정(學正)과정에도 적을 두고 4서를, 졸업 후에는 상급 단계인 한림(翰林)과정에서 5경을 배웠다. 이 씨는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명륜동에서 자취를 했는데 서울은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5년만 서울서 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공부에만 매달렸다”고 했다. 생활비는 사고 보상금과 부모님의 도움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그는 상경한지 5년이 지나도 서울을 떠나지 못한다. 1998년 2월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의 국역위원(國譯委員) 시험에 합격하기 때문이다. 국역위원 합격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전문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게 됐다는 의미도 있었다.” 장애를 입은 지 15년 만에 홀로 설 수 있게 됐다는 자신감, 안도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국역위원이 된 후 2012년까지 14년간 그가 번역한 책은 공동번역 17책(홍재전서 1책+ 일성록 16책), 단독번역 20책(일성록 19책+은대조례 1책). ‘고문서연구’ 등 전문지에 논문도 4편 발표했다. 적지 않은 성취다. 홍재전서는 정조의 시문과 교지를 묶은 전집이고, 일성록은 국왕의 일기로 그는 주로 정조의 것을 번역했다. 정조 전문가라 할 만하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현릉원으로 옮길 때 혼절하는 대목을 번역하며 감정이입이 됐는지 가슴이 뭉클했다. 정조가 제2차 영남만인소를 받고는 대표를 어전으로 불러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밝히는 모습에서 인간적 고뇌를 엿보기도 했다.”

그는 사료번역이 적성에 맞는다고 했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6년간 국사편찬위원회의 승정원일기 정보화사업에도 참여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승정원일기를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면서 승정원일기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이 씨는 2007년부터 3년간 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에서 번역위원들을 대상으로 ‘사료번역실습’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가 드물게 일성록과 승정원일기를 모두 섭렵한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사료번역실습 한 과목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좀더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있다고 믿게 됐다.” 이런 갈증을 풀기 위해 그는 2010년 1월 직접 한국승정원일기연구소를 만들고, 연구소 부설로 은대학당도 꾸렸다.

“예전부터 일정기간 공부를 마치면 남을 돕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경제적으로는 남을 도울 수 없으니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는 것도 재능기부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은대학당은 2년 또는 3년 과정의 강독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로5가 대우재단빌딩의 한 강의실을 빌려 매주 화, 목요일 저녁에 공부를 한다. 그동안 27명이 수료했고 내달 22명의 수료자를 새로 배출한다. 수강생은 주로 고전번역원 번역위원과 직원, 대학의 사학 전공자들. 강사료와 경비는 수강생들이 갹출해 마련한다.

지난해 11월 18일 저녁, 이 씨의 강의를 직접 들어봤다. 수강생 31명에 교재는 정원고사(政院故事). 순조 때 승정원이 정조의 대표적 지시사항을 뽑아 업무에 참고하도록 만든 일종의 업무편람이다. 미리 정한 수강생이 여러 문헌을 참고해 번역해온 것을 다른 수강생이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이 씨가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우리교육이 지향해야할 전형적인 토론식 수업이었다. 수강생인 이윤희 씨(53·고전번역원 번역위원)는 “승정원일기 번역을 맡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김윤지 씨(27·고전번역원 연구기획)는 “어렵지만 재미있다”고 했다. 김 씨는 번역위원 선발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수업내용은 솔직히 어려웠다. 다만 우리 사회가 온통 미래와 글로벌을 얘기할 때, 고전에서 내일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진지함은 곧바로 전해져 왔다.

그는 2012년 2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고전번역원 수석전문위원도 지냈다. “고전번역원에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3대 관찬(官撰)사료를 번역하는 곳이 역사문헌번역실이다. 수석전문위원은 번역위원들의 자문에 응하고, 사전에 없는 어휘 등을 조사해서 정리하는 일을 했다.” 번역위원은 80여 명. 번역위원들의 자문에 응했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이 씨는 2005년에 결혼했다. 성균관대 대학원 1년 후배인 노효경 씨(52)와 지금은 경기도 양평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다. 처갓집에서는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깊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부인도 국사편찬위원회의 일을 보고 있어 그야말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셈인데 옛일을 물어 무엇 하랴. 부부는 요즘 동네에서 배운 막걸리 만들기에 재미를 붙였다.

그는 수석전문위원에서 물러난 것을 계기로 그동안 번역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얻게 된 경험과 지식을 책으로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참고할 이론서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사료번역의 이론과 실제’ ‘승정원일기 개론’쯤 될 듯하다. 한두 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남의 글을 어떻게 잘 번역할까를 고민해온 전문가가 자기 글, 자기 목소리로 번역의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는 것이다. 설립 5년이 된 승정원일기연구소를 빨리 법인화해 내실을 기하고 은대학당을 확대하는 것도 꿈 중 하나다.

이 씨는 성균관 한림원 창립 20주년 기념 문집(2010년)에 ‘강철손의 꿈’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는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찾아갔던 부산 태종대 자살바위를 10년 만에 다시 둘러보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재활원에서 만난 한 소녀를 떠올렸다고 술회했다. “한쪽 다리를 자르고도 겨우 2년밖에 더 살지 못한 소녀, 내가 어려울 때 말없이 힘을 줬던 그 소녀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가자고 강철손을 모으며 다짐을 했다.” 그리고 “일체유심조-모든 것은 오직 내 마음이 만들어낸다”며 글을 맺었다. 글은 매우 비감했지만, 그는 이미 소녀에게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국고전번역원이 번역 중인 3대 관찬 사료는?▼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때 전대 왕의 사적을 실록청에서 정리해 만든 편년체 공식 사서.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실록(28종)을 총칭한다. 활자본 888책, 약 4700만 자. 실록이 완성되면 기초 자료인 사초 등은 폐기하고 실록은 사고에 봉안해 국왕도 함부로 볼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만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넣지 않는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68년,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가 1972년에 번역을 시작해 1993년에 413책(색인 34책 별도)으로 완성했다. 고전번역원에서 재번역에 착수해 현재 정조실록을 번역 중이며 완역에는 최소 12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국보 151호,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승정원일기

조선시대에 왕명의 출납을 관장했던 승정원에서 국정 행위를 일기 형태로 기록한 책. 필사본 3243책, 약 2억4000만 자. 단일 서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다. 조선 초기부터 기록했으나 전쟁과 화재로 일부 사라져 인조부터 순종까지 288년간의 기록만 남아 있다. 수시 열람 가능했다. 가장 생생하면서도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어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해독 가능한 한자로 바꿔 놓은 것(탈초)을 토대로 고전번역원에서 번역 중. 고종 순종 인조대를 끝내고 영조대로 들어갔다. 내년부터 번역에 속도를 내 50년 내에 완역을 목표로 하고 있다.(국보 303호,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일성록

영조 36년부터 순종까지 151년간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책. 필사본 2328책, 약 4800만 자. 규장각의 관원이 신하의 말과 글, 동정 등을 임금의 시각에서 기록했다. 정조가 세손 시절에 직접 쓰기 시작한 일기가 나라의 일기로 발전한 것. 수시 열람 가능했다. 다른 기록과 달리 중요한 내용은 강(綱)과 목(目)을 두어 내용 파악이 쉽다. ‘승정원일기’에도 없는 국가 차원 행사의 해설, 관찰사의 장계, 되돌려준 상소, 신하가 올린 글, 원통한 일에 대한 호소, 사신의 견문록도 들어 있다. 올해 정조대 번역을 끝내고, 순조대에 착수. 완역에는 20년 이상이 걸릴 듯.(국보 153호,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조선왕조실록#고전번역#성균관#승정원일기#일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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