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영화 ‘국제시장’과 한국의 아버지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오랜만에 꼭 보고 싶은 영화가 나왔다. 어제 개봉한 윤제균 감독, 황정민 김윤진 주연의 ‘국제시장’이다. 예고편과 제작노트, 뒷이야기 영상을 인터넷으로 살펴본 뒤 이번 주말에라도 영화관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이 영화의 핵심 주제는 ‘가장 평범한 아버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다. 1950년 6·25전쟁 때부터 지금까지 격동의 현대사를 살았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삶을 다룬다. 험난한 세상에서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40대 중반인 윤 감독은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 당신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를 바라보며 늘 죄송한 마음이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만든 영화”라고 했다.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는 흥남철수 과정에서 아버지와 헤어져 부산으로 피란을 간다. “아바이가 없으면 장남인 덕수 니가 가장”이라며 가족을 잘 지키라는 부친의 당부를 기억하면서 10대 초반에 소년 가장이 된다. 미군 병사들에게 “쪼꼬렛또 기브미”를 외치던 전쟁의 시대를 지나 돈을 벌기 위해 1960년대 서독에 광부로 가고, 1970년대에는 다시 베트남에 기술근로자로 떠난다. 자신의 소망은 늘 뒷전이었고 가족을 먼저 챙기는 삶을 보낸 뒤 노년을 맞는다.

‘국제시장’에는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대사가 적지 않다. 덕수는 파독(派獨) 간호원 출신의 아내(김윤진 분)에게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라고 말한다. 노년의 주인공이 부친의 사진을 보며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라고 흐느끼는 장면에서는 가장으로 짊어졌던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요 배경으로 부산 국제시장을 택한 이유를 제작진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 대한 헌사(獻辭)에 알맞은 공간을 고민하다가 과거 피란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현재까지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일상의 소박한 꿈과 희망이 움트는 국제시장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시사회나 예고편만 보고서도 가슴이 뭉클해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이 많다. 극심한 빈곤의 시대를 몸으로 겪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잘 모르는 젊은이들도 “우리나라와 어르신 세대에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베를린국제영화제 빌란트 슈페크 파노라마부문 집행위원장은 “영화 국제시장은 분단과 굴곡진 현대사를 딛고 전례 없는 발전을 이뤄낸 대한민국을 장엄한 영화적인 필치와 인간적인 차원의 이야기로 훌륭히 풀어냈다”면서 내년 2월 개막하는 이 영화제에 공식 초청했다.

덕수와 같은 산업화 시대 한국의 아버지들이 짊어졌던 가장의 책임은 지금 시대 아버지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앞 세대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일궈낸 경제 발전 덕분에 최악의 상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1955∼1963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를 비롯해 우리 시대 아버지, 어머니들의 삶을 관통한 키워드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의무감이 아니었을까.

연말을 맞아 각 기업과 기관들의 승진·전보 인사가 연일 신문에 실리지만 한편에서는 많은 아버지들이 소리 없이 직장을 떠났다. 한국 경제의 성장세가 꺾이고 기업 실적이 나빠지면서 회사에서 밀려나는 사람도 예년보다 크게 늘었다.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버팀목은 가족이다. 갑자기 닥친 추위가 한층 더 차갑게 느껴질 아버지들의 마음을 보듬어줄 성원과 격려가 절실한 겨울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