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수 전 국립암센터 원장 “癌은 미래 성장동력… 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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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 인생]

‘금연 전도사’ 이진수 전 국립암센터 원장. 그는 “암은 결코 투병 대상이 아니며, 친구처럼 같이 사는 것이지 완치돼서 사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금연 전도사’ 이진수 전 국립암센터 원장. 그는 “암은 결코 투병 대상이 아니며, 친구처럼 같이 사는 것이지 완치돼서 사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세상은 가도 가도 황톳길. 막막하고 아득하다. 어떤 이는 노래 부르며 가고, 어떤 이는 슬피 울면서 간다. 누구는 순풍에 돛단 듯 가고, 누구는 눈보라 폭풍우를 헤치며 간다. 넘어지고 깨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절뚝이며 간다. 바로 ‘오뚝이 인생’이다.

‘세게/더 세게/나를 쳐라//쓰러지지 않으면 내가 아니다/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내가 아니다’ (한명희 시인 ‘오뚝이’ 전문)

그렇다고 ‘10전10기’의 삶만이 꼭 ‘오뚝’한 것인가. 실패와 성공이 요동치는 인생만이 반드시 ‘오뚝오뚝’ 한 것인가. 아니다. 한평생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사람도 오뚝하다. 사노라면 몸은 쓰러지지 않아도, 가슴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바늘쌈을 삼킨 듯 콕! 콕! 밤새도록 창자를 찌르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 바늘로 한 땀 한 땀 우물을 파는 사람. 도끼날을 갈아 바늘을 만드는 사람. 누가 뭐래도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어가는 사람. 그리하여 처음은 미미하였으나 마침내 그 끝이 창대하게 오뚝오뚝 선 인생.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오뚝 인생’ 아닐까.

이진수 전 국립암센터 원장(64)은 쿨하다. 도무지 티를 내지 않는다. 세계적인 폐암 권위자로서 이름이 높지만, 그런 이야기만 나오면 손사래부터 친다. 그는 온화하고 조용하다. 어디에 나서길 꺼린다. 하지만 담배 이야기만 나오면 담빡 달아오른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금연 전도사.

“담배와 담배연기엔 69종의 발암물질과 7000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들어있다. 벤젠, 페놀과 같은 물질은 물론 청산가스, 비소 등의 독극물 성분도 있다. 흡연은 전체 암 사망 원인의 30%를 차지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남성 흡연율(2012년 기준)만 놓고 보면 42∼43%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아마 50%가 넘는 중국 남성 흡연율 다음이 아닌가 싶다. 암 예방에는 야채나 과일이 좋다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도 흡연자들은 보통 그런 걸 먹기 싫어한다. 담뱃값부터 올려야 한다. 서민경제에 주름살을 준다는데 그게 말이 되는가. 서민들은 담배 피워서 건강을 해쳐도 된다는 말인가. 금연 지킴이랄까 ‘담파라치’ 같은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금연구역만 설정해 놓으면 뭐 하나.”

사실 그도 한때 애연가였다. 젊은 시절 딱 10년 동안(1976∼1985년) 담배를 즐겼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마흔다섯의 어느 재력가가 폐암으로 병원에 온 지 열흘 만에 눈 감는 것을 보고 끊어버렸다. 20여 년의 흡연이 젊은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물론 담배는 끊기 어렵다. 니코틴은 끈질기고 집요하다. 오죽하면 말기 폐암 환자가 ‘담배 한 개비만!’을 호소하겠는가.

“1999년 미국 MD앤더슨암센터 시절,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어느 재벌그룹 회장이 폐에 이상이 있는데 치료가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그분이 ‘수술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헌데 그분도 애연가였다. 그해 12월 23일 병원에 처음 왔는데, 금연상담부터 했다. 도저히 못 끊겠다는 환자에게는 다른 처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단박에 ‘끊겠다’고 했다. 이듬해 봄까지 금연보조제 투약과 함께 항암치료, 방사선치료를 마쳤다.”

우리나라는 매년 22만 명의 암 환자가 발생한다. 이 중 폐암 환자는 한 해 2만2000여 명이 발생하고, 하루 46명꼴(한 해 1만7000여 명)로 사망한다. 영국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수명이 10년 정도 짧다. 폐암확률은 비흡연자보다 15배나 높다. 하루 한 갑 피우면 10배, 두 갑이면 20배. 술은 담배에 비하면 낫지만, 문제는 분위기다. 술 마시면 담배를 찾게 되고, 그 자리는 담배연기로 자욱해진다. 비흡연자까지 덩달아 흠뻑 연기를 들이마시게 된다.

“우리나라 여성 폐암 환자의 85% 이상이 담배를 입에 대본 적이 없는 분들이다. 어릴 적 아버지나 할아버지 삼촌들이 피워대던 담배연기에 대책 없이 노출된 게 폐암 발병 원인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면 4, 5명의 자식들이 그 연기를 고스란히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세포분열이 왕성해서 발암물질에 취약하다. 여자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흡연 남편으로부터의 간접흡연은 어릴 때의 그것에 비교하면 약소한 편이다.”

암은 옛날부터 있었다. 평균수명이 짧아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암은 오래 살면 생기는 병일 따름이다. ‘100세 시대’ 현대인에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암은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친 유전자 변화에 의해 생긴 만성병이다. 결코 어느 날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만큼 치료도 서서히 꾸준하게 하면 된다. 설령 암 덩어리가 없어지지 않아도, 더 커지지 않고 현상유지만 돼도 그게 어딘가.

“마흔 넘어 암 진단을 받으면 그러려니 생각해야 한다. 흔히 스트레스가 암을 만든다는 데, 그렇다고 이 세상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그보다는 스트레스 받는다고 술 마시고, 담배 마구 피우고 하는 자기학대가 더 큰 문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암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암 진단을 받으면 ‘아이고, 이제 죽었구나’ 생각한다. 우리문화는 사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다. 종교에서도 ‘염라대왕이 잡아 간다’ ‘지옥에 떨어진다’ 등 죽음을 먼저 강조한다. ‘사생결단’이란 말에서 보듯이 죽음이 먼저 나온다. 서양에선 사는 게 먼저다. 햄릿도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실제 우리나라에서 암 진단을 받은 사람 중엔 사망자보다 생존자가 훨씬 많다. 가장 최근의 암환자 5년 생존율은 66.3%다. 3명 중 2명은 산다는 얘기다. 전국 단위 암발생 통계가 잡히는 1999년부터 암 진단을 받은 후 살아있는 사람이 110만여 명(2012년 현재)에 이른다.”

의사라고 병이 피해가는 게 아니다. 1994년 12월, 이진수도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뇌하수체 종양 제거수술을 받았다. 1989년부터 이상 징후가 왔는데도 애써 무시했다. 의사는 알기 때문에 ‘설마 내가’ 하며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의사가 하는 말은 들어도, 의사 행동은 따라하지 말아야 한다.

손과 목이 굵어지고, 턱뼈가 커지고, 이 사이가 벌어졌다.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혀도 길어져 잠잘 땐 코를 드르렁거렸다. 목소리가 굵어져 바리톤이 됐다. 말단비대증이었다. 사춘기 이후에 발병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춘기 이전에 생겼다면 꼼짝없이 ‘거인’이 될 뻔했다.

“1994년 잠깐 한국에 돌아와 의대 동창들을 만났는데, 친구들이 하나같이 말단비대증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오랜만에 보는 내 얼굴이 변한 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수술은 근무하고 있던 MD앤더슨암센터에서 했다. 수술 중 죽을 수도 있었다. 아내는 근심스러운 눈으로 ‘할말 없어?’라고 물었다. 난 ‘응, 없어!’라고 말하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믿어주면 최선을 다한다. 수술 의사에게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라고 하는 것은 난센스다. 보통 암환자는 귀가 얇다. 병원 순례를 하는 이유다. 개똥쑥이니 사슴피니 효소치료니 면역치료니 하는 것들에 솔깃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이젠 서구식 식단 영향으로 위암은 줄어들고 대장암이 늘고 있다. 남성은 여기에 전립샘암이 증가하는 추세다. 대장암은 소화되고 남은 배설물이 오래 머무르는 직장(直腸)이나 에스결장에 많이 생긴다. 보통 역세권에 사람이 붐비고 사건사고가 많은 것과 같다. 소식(小食)하는 여성들은 변비가 문제다.

이진수는 올 6월 국립암센터 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젠 폐암센터 책임연구원으로서 백의종군 중이다. 올봄부터 자전거에 취미도 붙였다. 얼마 전 금강종주(146km)도 마쳤다. 재미가 쏠쏠하다. 가끔 못 치는 골프(100타)도 친다.

“난 ‘일단 소명을 받으면, 그에 따라 최선을 다하며 살자’는 주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아니라 ‘수천명(受天命)’ 후 ‘진인사(盡人事)’한다고나 할까. 사람은 ‘플랜 B’가 있으면 실패하기 쉽다. ‘뭘 해보겠다, 꼭 하고야 말겠다’는 순간 욕심이 생기고 결국은 무리하게 된다. 우선 주어진 것부터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 나에겐 두 가지 화두가 있다. 하나는 ‘암은 미래 성장동력’이라는 것. 이젠 우리도 좋은 치료약제를 개발해서 세계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또 하나는 ‘암이 사람을 행복하게도 할 수 있다’는 것. 암은 투병 대상이 아니다. 같이 살아가는 것이지 완치돼서 사는 게 아니다. 암을 친구처럼 생각해야 한다. 한 세상 산다는 건 쓰라림의 연속 아닌가. 좋든 싫든 그걸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암에 걸리면 인간은 겸허해진다. 삶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돈 많이 벌어서 뭐 하나. 사람이 자신을 낮추게 되면 자연스럽게 베풀게 되고 그럼으로써 행복해진다.”

이진수 약력


▽1950년 11월 19일(음력) 전북 익산 용안 출생 ▽용안초-전주북중-경기고-서울대 의대 졸업(1974) ▽서울대 보건대학원 보건학박사(2007) ▽미국 텍사스 MD앤더슨암센터 조교수·부교수·교수(1987∼2001) ▽MD앤더슨암센터 외래교수(2003∼현재) ▽국립암센터 부속병원장(2001∼2004) ▽12차 세계폐암학술대회 조직위원장(2003∼2007) ▽세계폐암학회 이사(2005∼2007) ▽대한암학회 회장(2010∼2011) ▽국립암센터 연구소장(2006∼2008) ▽국립암센터 원장, 재단법인 국립암센터발전기금 이사장(2008∼2014) ▽국제암대학원대 초대 총장(2013∼2014)

♣훈포장

▽알리안츠제일생명 올해를 빛낸 한국인상(2001) ▽제3회 암 예방의 날 국민훈장 동백장(2010) ▽(사)한국언론인협회 자랑스런 한국인대상(2012) ▽제13회 서울대AMP대상(2014)

▼ 국립암센터 원장서 물러난 뒤 책임연구원으로 ‘백의종군’ ▼

“할머니-어머니-장모님 모두 암으로 별세… 암 연구는 내 숙명”


거제도 1차 진료 의사 시절의 이진수 전 원장(왼쪽). 이진수 전 원장 제공
거제도 1차 진료 의사 시절의 이진수 전 원장(왼쪽). 이진수 전 원장 제공
1978년 10월 31일. 이진수는 만삭의 아내와 함께 미국 땅을 밟았다. 품엔 두 살배기 아들이 잠들어 있었다. 날씨는 잔뜩 찌푸렸고 을씨년스러웠다. 게다가 마침 ‘핼러윈데이’여서 집집마다 무서운 모양의 호박등불(잭오랜턴)이 걸려 있었다. 온통 검은색의 해골, 악마, 마녀, 유령 형상들이 주렁주렁했다. 몸이 오싹오싹 소름이 끼쳤다.

처음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아내의 간호사 취업비자만 믿고 부랴부랴 건너온 탓이었다. 여기저기 지원서를 내봤지만 의료인력 모집기간이 끝나버려 소용없었다. 아내는 미국 도착 19일 만에 몸을 풀었다. ‘살림밑천’ 큰딸이 태어났다. 우선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게 급선무였다.

수술실 보조원부터 시작했다. 시간당 3달러 50센트. 의사와는 출입문부터 달랐다. 하지만 얻는 것도 있었다. ‘뛰는 심장을 멈추게 한 뒤 얼음으로 보존하여 수술한 뒤, 다시 뛰게 하는 신기술’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정신병동에서 환자 의무기록을 해주는 ‘하우스 스태프’ 일도 했다. 한번은 창고지기를 해보려고 갔다가 덩치(170cm 65kg)가 작아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 정도야 고생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선배들 중에는 달랑 100달러 가지고 태평양을 건넌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우리 시대엔 죽지 않기 위해 누구나 그렇게 살았다. 하여튼 난 그렇게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갔고, 미국 도착 8개월 후 시카고의 노스웨스턴대 자매병원에서 내과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었다.”

이진수는 국내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지 못했다. 학생운동 전과가 발목을 잡았다. 대신 거제도 ‘1차 보건의료 전달체계 프로젝트’에 자원하여 1차 진료 의사를 담당했다. 서울대병원 인턴 과정과 서울대 보건대학원 석사를 마친 뒤였다. 1차 진료 활동과 가족계획, 기생충 관리, 결핵관리, 모자보건 사업 등의 일을 했다. 내친김에 그곳에서 방위로 군대생활까지 마쳤다.

“거창하게 학생운동은 무슨…. 난 결코 그런 위인이 못 된다. 그저 국민건강권 보장을 말했을 뿐이다. 가난해서 걸리는 영양실조나 폐결핵 등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난 거제도에서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거꾸로 나오는 아이를 두 번이나 받은 곳도 거제도였다. 의사로서 평생 신생아를 받은 것은 그게 전부다. 요즘 같으면 크게 낳기 때문에 어려웠을지도 모르는데, 당시엔 잘 못 먹고 살던 시절이라 아이들도 작게 태어나 가능했을 것이다.”

이진수의 고향은 금강 하구의 전북 익산시 용안(龍安). 1950년 난리 통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으로 얼굴을 기억할 수 없다. 전주이씨 완창대군파 11대 종손. 무녀 독남. 어머니(1926∼1975)는 아들을 한 해 일찍 초등학교에 보냈다. 햇수로는 여섯 살이지만, 실제로는 음력 11월생이라 5년 4개월짜리가 학교에 들어간 것이었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시절 덕성여고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고향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천방지축 뛰어놀기 좋아하던 나를 중학입시를 위해 과외까지 시키셨다. 용안읍내 양조장집에 방을 얻어 나를 포함해 4명의 개구쟁이들이 담임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공부는커녕 틈만 나면 쏘다니며 놀았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내가 의대를 졸업하던 1974년 가을 위암진단을 받았다. 배에 물이 차서 먹는 음식마다 토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고통스러웠다. 풍습에 따라 운명하시기 전 수의를 갈아입히려는데 ‘걱정하지 마라, 난 안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1975년 8월, 그게 마지막 말씀이 되었다. 허망했다. 이미 그해 봄엔 할머니가 자궁암으로 눈을 감으셨고, 10여 년 후엔 어머니와 동갑내기 장모님(1926∼1989)도 역시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어쩌면 내가 미국에서 암을 전공하게 된 것은 숙명이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이진수#오뚜기 인생#오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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