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농축 시인’에 부시 중유공급 중단… 8년만에 파국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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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美 제네바 합의 20년]북핵 해법, 3번의 ‘잃어버린 기회’

“동북아시아의 핵 경쟁이 사라지게 됐다.”

1994년 10월 21일 북-미 간 제네바 합의 타결 직후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이같이 진단했다. 하지만 20년이 흐른 지금도 북핵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북한 핵 협상은 첫걸음부터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 ‘야욕’ 자체를 무마시킬 수는 없었더라도 효율적인 협상으로 핵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잃어버린 기회들’에 주목하는 이유다.

○ 2002년 10월―설익은 제네바 합의 파기?

2002년 10월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단에 북한은 농축우라늄(HEU) 핵개발 프로그램을 시인했다. 2차 핵 위기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후폭풍은 거셌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대북 중유 공급을 즉각 중단(11월)했고 북한은 제네바 합의 파기를 선언(12월)했다.

이 과정에 보다 정교한 대응이 필요했다는 지적이 많다.

존 딜러리 미국 아시아소사이어티 미중관계센터 소장은 1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악의 축’ 북한과는 협상하지 않겠다던 부시 행정부 강경파들이 궁극적으로 제네바 합의 파기를 유도한 측면이 있다”며 “(중유 중단 대신) 플루토늄 문제만을 다뤘던 제네바 합의에 HEU 문제를 추가하는 협상을 계속해야 했다”고 밝혔다. 부시 행정부 2기가 결국 ‘6자회담’이라는 틀로 협상에 나선 것도 이 같은 ‘실수’를 인정한 꼴이라는 지적이다.

○ 2008년 8월―김정일의 뇌혈관 이상에 ‘핵 협상’ 스톱

“2008년 8월 한미 정부가 파악한 김정일의 뇌혈관 이상이라는 변수는 기존의 모든 상황을 과거로 돌려버린 사건이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은 김정일의 건강 이상이 핵 협상 기류를 180도 변화시킨 변수였다고 지적했다. 6자회담을 통해 관련국들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동결에 합의했지만 김정은 건강 이상이라는 돌발 변수는 한미 양국이 ‘북핵 협상’에서 ‘북한 급변사태 준비’로 대북 정책 중심을 옮기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북한의 붕괴가 임박할 것이라고 믿는 목소리로 인해 대북정책의 유연성이나 협상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 2009년 8월―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기회

2009년 8월 억류 중이던 미국인 여기자 2명을 석방하기 위해 방북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을 오바마 행정부의 ‘잃어버린 기회’의 한 장면으로 꼽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당시 그의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해 성사된 방북을 물밑 북핵 협상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김정일과 사진 찍을 때 웃지도 찡그리지도 마라”는 요지의 행동지침을 사전 브리핑했다. 최근 기자와 만난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정치인인 클린턴이 카메라 앞에서 무표정한 모습을 지은 것은 아마 그때가 유일할 것”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딜러리 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전 대통령을 만나기를 원했던 것으로 안다”며 “진지한 물밑 대화의 기회였지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엄격한 제약 속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략적 인내’라는 기조 아래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방치한다는 지적이다.

:: 제네바 합의 ::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불거진 ‘1차 북핵위기’ 이후 1994년 10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이룬 합의.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 2기를 건설하고 연간 50만 t의 중유 지원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김정안 jkim@donga.com·윤완준 기자
#북한#북핵#제네바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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