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과에서 부부 80쌍 탄생? 실습실서 함께 보석 다듬다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7일 14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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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과에서 80쌍의 부부가 탄생한 연유는?

현재 한 돈짜리 금반지 공임은 8000원으로 20년 전에 비해 오히려 2000원이 싸졌다. 다른 물가는 몇 배나 올랐는데 금반지 공임은 거꾸로 내려갔다. 한국 귀금속 디자인의 현주소다. 일반인들에게 금과 다이아몬드는 무게와 크기만이 관심이지 디자인은 뒷전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한국의 귀금속 디자인은 '단순 작업'으로 평가절하돼 몇 십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소품종 대량생산 위주의 한국의 귀금속 산업을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바꾸는데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이 변하지 않으면 한국의 귀금속은 '가락지'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귀금속과 보석에도 '한류디자인'이 나올 때가 됐다. 원광대 귀금속보석공예학과의 변신을 주목하는 이유다.

원광대 귀금속보석공예학과는 1978년 학과가 생긴 이래 요즘 가장 의미 있는 도전을 시도 중이다. 기능위주의 수업을 과감히 포기하고 디자인 중심의 교육과정으로 바꾸는 게 골자.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시대흐름을 반영한 결과다. 창의적 디자인의 귀금속만이 시장에서 통하고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학과가 갖추고 있는 인프라는 전국 최고 수준. 미대에 속해 있는데도 5층짜리 단독 건물을 학과 단독으로 사용 중이다. 이 안에는 각 학년이 쓸 수 있는 다양한 실습실과 모든 귀금속을 가공하고 디자인할 수 있는 기자재들이 완벽하게 구비돼 있다. 좋은 시설은 부부의 인연을 맺어주는 산실이기도 하다. 실습실에서 오랜 시간 함께 과제에 몰두하다보니 부부의 연을 맺은 커플이 이 학과에서만 무려 80쌍이나 나왔다.

학과가 변화에 나선 이유는 기능 위주의 기존 교육으로는 창의적인 디자인이 가능한 인재를 공급할 수 없다고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학과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곳은 이탈리아 리치몬드 그룹의 '크리에이티브 아카데미(Creative Academy)'다. 리치몬드 그룹은 까르띠에, 피아제, 몽블랑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20여 개를 거느리고 있다. 이 그룹은 2004년 디자인 사관학교인 '크리에이티브 아카데미'를 설립해 디자이너들에게 독창적인 교육을 시킨 뒤 계열사로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원광대 귀금속보석공예학과의 변신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고승근 교수는 "귀금속보석공예학과가 지향하고 있는 디자인 중심 교육은 인문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즉 지성 감성 인성의 가치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재발견하고 이를 창의적 사고의 자양분으로 삼아 인간중심의 주얼리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기르겠다는 것. 한마디로 '인문융합 창의 디자인'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학과의 새로운 시도는 최근 교육부 선정 '지방대학 특성화 사업'에 선정됨으로써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5년간 매년 3억 원씩 받는 지원금을 더 좋은 시설을 만들고 더 우수한 교원을 채용하는 데 쓸 예정이다.

원광대 귀금속보석공예학과 4학년 학생들이 졸업작품을 만들고 있다.  학과는 기존의 실기는 실기대로 장점을 유지하고 디자인마인드 확립을 위한 교과개정 개편에 시동을 걸었다.
원광대 귀금속보석공예학과 4학년 학생들이 졸업작품을 만들고 있다. 학과는 기존의 실기는 실기대로 장점을 유지하고 디자인마인드 확립을 위한 교과개정 개편에 시동을 걸었다.
학과는 2014학년도 2학기부터 교과과정의 대대적인 개편에 나섰다. 개설된 38개 학과목 중 내년까지 18개를 개편하고 그 과목들 전부를 디자인 실기와 연관시킬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스토리텔링 디자인, 인포그래픽 디자인, 리테일링 디자인, 상상과 표현, 상상과 발상 등의 교과목을 정식 커리큘럼 안에 포함시켜 학생들의 창의성을 자극하겠다는 것이다. 학과에는 이미 변화를 상징하는 과목이 일부 개설돼 있기도 하다. 1학년 학생들이 듣는 기본전공 과목인 '기초조형'이 바로 그것. 담당인 장진희 외래교수는 "'디자이너는 왜 이런 디자인을 했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만의 '디자인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상상력을 디자인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예를 들자면 움직이는 고양이를 보고도 학생마다 감정이 다를 것이다. 그 다른 감정을 디자인으로 표현하도록 학생들을 유도한다. 신문기사를 가져와 디자인하라는 과제도 내주는데 처음에는 학생들이 따라오기 힘들어하다가 나중에는 자신들의 독창성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학과의 최종 목표는 디자인을 징검다리 삼아 창업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카피 위주의 주얼리산업에 취직시키는 것보다 자신만의 디자인으로 창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학생과 산업발전에 모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학과 4학년인 최연철 씨(26)는 이렇게 말한다. "과에 들어와 귀금속 디자인과 가공 감별 등 기초부터 심화과정까지 주얼리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 정교수들뿐 아니라 15명의 외래교수들도 실력파여서 현장 실무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디자인 중심의 교육이 좋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사극에서 쓰는 주얼리를 만드는 방송국 미술팀에 들어가고 싶다. 창업도 물론 고려 중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시장에 나간다면 어떤 변화를 몰고 올 것인가. 주얼리 시장의 부가가치가 높아지면서 그 과실을 누릴 수 있고, 시장 규모도 키울 수 있다고 고승근 교수는 지적한다.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 값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1000만 원 수준으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세팅, 즉 디자인이 끝난 후 그 차이는 배로 벌어진다. 티파니에서 디자인한 반지는 2000만 원인데, 한국에서 디자인한 것은 1100만 원에 불과하다. 디자인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디자인 수준에 따라 같은 재료를 사용한 귀금속 가격이 15배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고승근 귀금속보석공예학과 교수가 '유색보석감별'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현미경을 이용한 다이아몬드 감정법을 가르치고 있다.
고승근 귀금속보석공예학과 교수가 '유색보석감별'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현미경을 이용한 다이아몬드 감정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 학과 출신으로 주얼리 중견 업체인 '듀봉주얼리'를 운영하며 패션 주얼리 과목을 강의하는 김두봉 외래교수는 "2010년부터 보석 소비자들이 디자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개인별 맞춤형 보석디자인이 필요한 시대로까지 왔다. 귀금속보석공예학과의 디자인 중심 교육을 받고 나온 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크다"며 디자인을 중심으로 변신하려는 학과의 시도를 지지했다.

원광대 귀금속보석공예학과의 도전은 '누에의 허물벗기'에 비견할 만하다. 아직도 몇 번이나 변신을 꾀해야 할 것이다.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고 교수는 말한다. "학과 경쟁력을 갖추면 좋은 학생이 지원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좋은 교수들을 확보할 수 있고, 좋은 교수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구축하고 싶은 '선순환 사이클'이다."

익산=이종승 콘텐츠기획본부 전문기자 (동아일보 대학세상 www.daese.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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