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딸 바보’ 할아버지 최인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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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기 앞두고 ‘나의 딸의 딸’ 출간

“그 책 어떻게 되고 있어.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지난해 9월 19일 병마와 사투를 벌이던 최인호 작가는 서울성모병원 병실로 찾아온 40년 지기 김성봉 여백출판사 대표에게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김 대표는 “형, 잘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 마. 작가의 말 쓸 준비나 해둬”라고 답했다. 최 작가는 비로소 안심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 병세가 급속히 악화됐고 엿새 뒤인 25일 별세했다.

고인이 임종 직전까지 챙기던 책, ‘나의 딸의 딸’(사진)이 1주기를 앞두고 16일 출간됐다. 고인이 평소 ‘위대한 유산’이라고 했던 딸 다혜 씨(42)와 외손녀 성정원 양(14)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원고는 1975년 9월부터 2010년까지 월간 샘터에 연재한 소설 ‘가족’ 중 딸과 외손녀 이야기를 따로 추린 것이다. 고인은 2008년경부터 이 책의 출간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아내 황정숙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남편이 제목까지 정해놓고 기다렸고 딸이 처음으로 아버지 책에 그림까지 그린,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책”이라고 말했다.

○ 딸 다혜

책 표지와 17장의 삽화는 모두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나온 화가 다혜 씨 작품이다. 생전에 고인은 “다혜가 그린 색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며 자랑하곤 했다. 김 대표는 “(딸이) 생전에 아버지와 함께 작업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컸던 것 같다”며 “아빠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순수한 바람에서 표지와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책 속에서 고인은 딸이 커가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대견하게 바라보면서도 철든 딸과의 갈등도 솔직하게 썼다. 딸이 자신을 ‘전형적인 구세대의 낡은 유물처럼 생각한다’고 섭섭해하면서도 딸의 성장을 인정했다.

“다혜는 내 자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격을 지닌 자유인인 것이다. 나는 다만 아버지로서 그녀가 우리의 곁을 떠날 때까지 잠시 맡아 기르는 전당포 주인에 불과한 것.”

○ 딸의 딸, 정원

고인은 유독 외손녀라는 말을 싫어했다. 대신 ‘딸의 딸’이라는 표현을 썼다. 김 대표는 “최 작가가 평소 외손녀란 표현은 거리감이 느껴진다며 딸의 딸이란 말을 고집했다”며 “암 발병 이후 정원이 이야기를 더 열심히 썼다”고 전했다.

엄격했던 아버지는 딸의 딸 앞에선 철부지 할아버지로 변신한다. 한 번도 가족사진을 가지고 다니지 않던 그는 ‘정원교 토테미즘 맹신자’가 돼 처음으로 지갑에 정원이 사진을 넣었다.

책에는 고인이 딸의 딸에게 쓴 편지와 그림도 담겼다. 고인은 책 원고를 쓸 땐 악필로 유명했다. 심지어 자신이 쓴 글도 해독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딸의 딸에게는 마치 초등학생이 쓰듯 꾹꾹 정자체로 눌러 썼다.

‘사랑하는 정원에게. 할아버지는 정원이가 있어 이번 여름에 긴 병과 싸울 때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어. 정원아. 정말 고마워. 마치 수호천사가 있는 것 같았어. 정원이의 편지처럼 할아버지는 울지 않을게….’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나의 딸의 딸#최인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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