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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영화감독 이장호의 서울 ‘안산(무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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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영화감독 이장호의 서울 ‘안산(무악산)’

동아일보입력 2014-05-10 03:00수정 2014-05-1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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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하게 퍼지는 아까시꽃 향기… 내 영화도 그랬으면”
서울 안산(무악산) 앞에 선 이장호 감독. 오른쪽 끝이 봉수대. 어릴 적엔 까마득했는데 이제 보니 지척이다. 그는 먼길을 돌고돌아 다시 안산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영화감독 이장호(69)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123번지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근인 아현동으로 이사했다가, 상도동에 살 때 영화 ‘별들의 고향’을 찍었다. 그 이후 한동안 서울 강남으로 건너가 살다가, 2000년 다시 그의 뿌리 북아현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릴 적 안산(鞍山·무악산 296m) 일대를 뒷동산처럼 뛰어놀았다.

“안산꼭대기 봉수대를 우리는 ‘말바위’라고 불렀다. 동무들과 곤충채집을 하다가 문득 홀로 떨어져 무서워했던 기억도 난다. 이제 돌아와 보니 살던 집엔 고시원 건물이 들어섰고, 가늘었던 성황당나무가 우람해졌다. 요즘 짬이 나면 안산둘레(자락길 7km)를 느릿느릿 홀로 걷는다. 아까시꽃 향기가 참 좋다. 2시간쯤 걷다보면 몸과 마음이 맑아진다.”

이장호의 아버지 이재형 씨(1920∼1999)는 공보처 영화검열관이었다. 아버지의 꿈은 영화배우였지만 그게 안 되자 영화를 보는 직업을 택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낚시단짝이었다. 이장호가 초등학교 5학년 땐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월척을 낚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장호가 고등학교를 마치자 곧바로 쌍꺼풀 수술부터 시켰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는 뒷전이고 밖으로 뱅뱅 돌자 미련 없이 신상옥 감독에게 데려가 맡겼다. 한마디로 쿨했다. 아버지는 후에 아들 영화에 자주 출연했다. ‘사기 치는 학원장’(어둠의 자식들) 등 단역에서 배우가 되겠다는 소원을 풀었다.

아버지는 이장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수많은 영화를 함께 보았다. 이장호는 제목도 내용도 모르는 영화를 보면서 무의식 속에 한 장면 한 장면을 새겼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빨래 펄럭이는 장면’도 그중 하나다.

“1980년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바로 리얼리즘 영화다. 엄혹한 시절, 마침 검열위원이었던 박완서 선생이 10시간동안이나 ‘하나도 손보면 안 된다’며 주장하신 덕분에 살아남았다. 정말 고마웠다. 난 1974년 ‘별들의 고향’이 히트하자 자만했다. 붕 떠 있었다. 그건 행운이었지 내 실력이 아니었다. 1976년 대마초를 피웠다가 나와 동생 영호(63)가 덜컥 걸려들었다. 당시 신촌 대학가에선 ‘까치(낱개)담배’를 많이 팔았는데 거기엔 으레 대마초가 섞여 있었다. 누가 한번 피워보라길래 호기심으로 손을 댄 게 치명적이었다. 난 그걸 자랑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어휴, 입방정! 활동금지로 집, 차 다 팔고 시민아파트에서 살았다. 어머니와 명동에서 막걸리집을 했다. 그때 난 비로소 현실에 눈을 떴다. 빈곤, 부정부패 등 사회부조리에 분노했다. 그런 영화가 미치도록 만들고 싶어 아내 앞에서 울었다. 왜 한국영화는 아리랑(나운규), 오발탄(유현목), 마부(강대진) 이후 리얼리즘영화가 끊겼을까.”

이장호는 여태껏 영화 20편을 찍었다. 이 중 3편이 한국영상자료원 선정 ‘한국영화 톱10’에 들었다. ‘별들의 고향⑥’ ‘바람 불어 좋은 날⑦’ ‘바보선언⑨’이 그렇다. 신상옥 ‘사랑방손님과 어머니⑨’, 임권택 ‘서편제⑨’, 김기영 ‘하녀①’, 유현목 ‘오발탄①’, 하길종 ‘바보들의 행진①’, 봉준호 ‘살인의 추억⑦’ 등 내로라하는 감독도 한 편을 넘지 못했다.

이장호는 밥을 굶거나, 어렵게 산 적이 없다. 줏대 있게 살아본 적도 없다. 무슨 거창한 역사의식, 사회의식 같은 것도 없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덜렁거리고, 말도 많고, 주책없고…. 그는 책상머리에서는 꿈을 꾸지 못했다. 머리에 쥐가 났다. 조직, 제도 같은 틀은 숨이 턱턱 막혔다. 플롯을 치밀하게 짜낼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장에 가면 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뭔가 꿈틀거렸다. 웬만하면 스타배우도 쓰지 않았다. 왠지 기존 연기스타일이 거북하고 싫었다. 신인배우가 좋았다. 이장호는 ‘어제 내린 비’에 약속대로 그의 동생 이영호를 주연으로 발탁했다. 김명곤, 박원숙, 나영희, 이보희도 그의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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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 밑에 있을 땐 열등감이 많았다. 말이 조감독이지 온갖 허드렛일은 도맡아했다. 해마다 신춘문예 계절이 오면 동아일보에 시나리오공모를 해볼까 하고 끼적거리다가 결국 다 완성하지 못했다. 예쁜 여배우들은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윤정희가 단연 으뜸이었다. 다른 여배우들은 날 ‘여기요’, ‘저기요’하고 불렀지만, 윤정희는 톱스타인데도 꼬박꼬박 ‘장호 씨’라고 불렀다. 뒷날 백건우와 연인관계란 걸 알게 되자 그런 감정은 스르르 사라졌다. 백건우는 영화에도 엄청 해박했다. 윤정희의 ‘그이는 잎이 무성한 나무 같다’라고 한 말이 틀림없었다. 이보희(조영숙), 나영희(방숙희) 이름은 내가 지어줬다. 이보희는 한때 ‘그녀에 맞춰서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내가 질투를 했는데, 다행히 그녀가 시집을 갔다. ㅎㅎㅎ 박원숙은 에너지가 넘치는 배우다. 연기몰입이 대단하다. 김명곤은 연기력보다는 그 열정이 존경스럽다.”

이장호는 1987년 ‘Y의 체험’을 찍은 이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뭘 해도 꼬였다. 잔치는 끝났다.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무능한 존재’라는 생각에 잠을 못 이뤘다. 1996년 두 번째 결혼하면서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었다. 큰딸(41)과 아들(37)은 해외에서 살았다. 그 늦둥이가 벌써 ‘고3’이다. 이장호는 아들에게 공부보다는 배짱을 키우라고 말해준다. 남들 공부할 때 넌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벌써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을 해치웠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도 마쳤다. 아내(53)가 불안해하지만 이장호는 믿는 구석이 있다.

“지나놓고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해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 친구 소설가 (최)인호도 그의 유고집 ‘눈물’을 읽어보면 ‘글재주라는 에고이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마지막 투병기 5년을 빼곤 ‘속물적 삶’을 살았다. 나야 말할 것도 없다. 돈, 명예, 인기 같은 헛된 것만 좇았다. 관객을 돈벌이 대상으로만 알았다. 이제부터라도 관객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이번에 내놓은 ‘시선’이 그 첫 작품이다. 인호가 유고집에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으면, 우선 좋은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천번만번 옳은 말이다. 고맙다.”  

▼ “인호 오면 주세요” 다짜고짜 놓고 온 15만원

‘별들의 고향’과 친구 최인호


영화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가 스물아홉 때 찍었다. 소설가 최인호(1945∼2013·사진)가 그의 친구였던 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당시 최인호 소설 ‘별들의 고향’은 불티나게(100만 권 추산) 팔렸다. 상하 두 권(각권 900원)으로 펴낸 최해운 도서출판 예문관사장도 대박을 쳤다. 최 사장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던 것이 행운을 불렀다. 병상에 누워있는데 간호사들이 그날 조선일보 연재(1972.9∼73.9) ‘별들의 고향’을 서로 보겠다고 다퉜다. 그는 퇴원하자마자 계약금 50만 원을 들고 최인호부터 찾아갔다.

“난 신상옥 감독(1926∼2006) 밑에서 8년째 연출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연출이 뭔지도 몰랐다. 신 감독은 콘티(대본) 같은 게 없었다. 모든 게 그의 머리 속에 있었다. 카메라도 신감독이 직접 잡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내용을 찍는지 알 수 없었다. 연기도 거의 배우들에게 맡겼다. 내가 어깨너머로 배운 건 조명, 촬영, 소품 같은 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기사를 보게 됐다. 소설 ‘별들의 고향’을 영화로 만드는 데 정소영(1928∼), 최하원(1937∼) 같은 당대 최고 감독들이 거론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맨 끝에 내 이름도 하나 살짝 걸쳤다. 난 갑자기 투지가 솟아올랐다. 그래, 한번 해보자. 그 길로 당시 홍익대 조소과에 다니던 여섯 살 아래 동생 영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동생에게 ‘한 학기 휴학하고, 등록금(15만 원) 좀 잠깐 빌려 달라’고 설득했다. 꼭 배우 시켜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최)인호가 나한테 돈을 달란 적은 없지만 우선 그래야 될 것 같았다. 인호는 여러 영화제작사에서 달려들자 골치 아파했다. 아예 모든 것을 예문관 최해운 사장에게 일임해 놓고 있었다. 인호는 집에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아내(황정숙 여사)에게 ‘인호 오면 주라’며 다짜고짜 그 돈을 놓고 와버렸다. 얼마 후 마음이 약해진 인호한테서 전화가 왔다. 고래고래 소리부터 질렀다. 화가 단단히 난 목소리였다. 결국 ‘이 새끼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네가 알아서 해, 난 몰라’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장호와 최인호는 초중고를 같이 다녔다. 이장호는 북아현동에 살았고, 최인호는 큰길 건너 평동(현 강북삼성병원 부근) 시장통에서 살았다. 이장호는 컸고(현재 176cm), 최인호는 작았다. 이장호는 늘 뒷자리에 앉았고, 최인호는 맨 앞줄에 앉았다.

덕수초등학교 시절,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이 ‘최인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한 조그만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나갔다. 교장선생님은 최인호에게 전국백일장대회에서 장원을 했다며 상을 줬다. 이장호는 백일장이 뭔지도 몰라 뜨악했다.

‘별들의 고향’에서의 신성일과 안인숙. 동아일보DB
서울중학교 1학년 이장호와 최인호는 같은 반이었다. 그때도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이장호는 큰애들과 껄렁댔고, 말없는 최인호는 애늙은이처럼 조숙했다. 어느 날, 국어선생님이 급우들에게 최인호 글을 읽어줬다. 그러면서 최인호에게 ‘이거 정말 네가 쓴 거냐? 어디서 베낀 것 아냐?’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연애소설이었다. 이장호는 중1이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중3 때 이장호는 담배를 배웠다(1992년부터 금연).

결국 최인호는 서울고 2학년 때(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벽구멍으로’라는 단편으로 입선했다. 이장호는 밴드부에서 색소폰을 신나게 불고 있었다. 그들은 고교졸업 후부터 친해졌다. 최인호는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이장호에게 대학노트의 습작을 보여줬다. 이장호는 올챙이가 꼬물꼬물 하는 듯한 악필에 기가 질렸다. 하지만 조금씩 독해가 되면서부터 그의 도시적인 문체에 빨려들었다. 최인호가 북아현동 목욕탕 2층에 신혼살림을 차렸을 땐, 한밤중 물통을 타고 올라가 그를 깨우곤 했다. 밤새 술을 마셨다.

“내가 ‘별들의 고향’ 감독을 맡으니 모두들 못 미더워했다. 스태프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십대 풋내기 초짜감독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제작사 화천공사와는 감독협회가 정한 최저개런티 45만 원에 계약했다. 첫날부터 콘티도 없고 무엇부터 찍어야 할지 막막했다. 맨땅에 헤딩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다행히 카메라감독 장석준 씨(1935∼1980)와 손발이 맞았다. 모든 장면을 그와 하나하나 상의해가며 찍었다. 그동안 내가 일본잡지 ‘아사히 카메라’에서 스크랩해 놓은 장면을 보여주면, 그가 기가 막히게 되살려냈다. 그렇게 ‘별들의 고향’은 내 감각에 따라 즉흥적으로 찍었다. 그저 소설책만 들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장면을 찍어댔다. 주연 신성일 씨는 ‘영화는 영화고, 원작은 원작일 뿐’이라며 뼈있는 말을 던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필름들을 편집실에서 하나의 스토리로 엮었다. 한마디로 난 ‘무식한 아마추어’였다. 가수 이장희의 영화음악도 엉뚱했다. 화면과 못 맞춰, 다음 장면이 이어지는데도 계속 흘렀다. 나중에 보니 그게 오히려 신선했다.”

영화 ‘별들의 고향’은 대박 났다. 국도극장(관람료 450원)에서 105일 동안 46만5000명의 관객이 몰렸다. 당시 서울시민 300만 명. 한 해 한국영화 120편 중 5만 관객 넘은 영화가 15편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출연진도 화제였다. “경아, 오랜만에 함께 누워 보는군”의 신성일(문호 역), “술 한 잔 하실래요. 제 입술은 조그마한 술잔이에요”의 안인숙(경아 역)에서부터 윤일봉 백일섭 하용수 전원주 등 저마다 한몫을 단단히 했다.

이장희의 동생과 개그맨 전유성도 잠깐 얼굴을 비치고, 이장호 자신은 물론 이장호의 아내와 아이 그리고 원작자 최인호도 놀이터에서 딸을 안은 채 깜짝 출연했다. 영화음악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은 인기가요로 떴고, 키스신에서 처음으로 혀를 사용한 것은 ‘덤 볼거리’였다.

노 개런티 출연을 자원했던 아역배우출신 안인숙은 보너스로 15만 원을, 이장호는 계약대로 45만 원을 받았다. 그중 15만 원은 조감독 몫. 그는 ‘딱 30만 원’을 손에 쥐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1945년 5월 15일(음력 4월 4일) 서울 서대문 북아현동 출생 ▽덕수초-서울중-서울고 졸업 ▽홍익대 건축미술학과 입학(1964)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 입사, 연출부생활(1965년부터 8년) ▽‘별들의 고향’으로 대종상신인감독상(1974) ▽대마초흡연으로 활동 정지(1976), 해제(1979) ▽기획사 ‘이장호 워크숍’ 설립(1984) ▽‘판’ 영화사 설립(1986) ▽전주대 교수(2000) ▽옥관문화훈장(2003)

★이장호 감독 영화(총 20편) ▽별들의 고향(1974) ▽어제 내린 비,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그래그래 오늘은 안녕(1976)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 ▽일송정 푸른 솔은, 과부춤, 바보선언 (1983)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 ▽이장호 외인구단(1986)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Y의 체험(1987) ▽미스 코뿔소 미스타 코란도(1990) ▽명자 아끼꼬 쏘냐(1992) ▽천재선언(1995) ▽시선(2014)

★오페라연출 ▽황진이(1995) ▽내 잔이 넘치나이다(2009)

▼저서=모두 주고 싶다(1980), 바보처럼 나그네처럼(1987)

♣현재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부학장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
#블랙야크#무악산#이장호#별들의 고향#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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