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4·16을 ‘안전國恥日’로 삼아 국가시스템 다시 세워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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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불과 2주일 전인 7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재난 유형별로 3000개가 넘는 위기관리 매뉴얼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상세하고 좋은 매뉴얼이라도 담당자들이 모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 능력을 보면 실제 상황에서 매뉴얼을 얼마나 작동시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사고 발생 5일째인 어제 실종자 가족들은 대통령을 면담하러 가겠다며 농성을 벌였다. 구조 현장의 혼선과 가족들의 불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다. 세월호로부터 처음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해경과 해군은 배에서 빠져나온 승객들만 구하는 데 급급했다. 또 경험이 풍부한 최고전문가를 책임자로 내세워 상황을 총괄하게 해야 하는데도 정부는 우왕좌왕했다. 구조 작업의 컨트롤타워는 해경에서 안전행정부로, 국무총리로 옮겨가면서 손발이 안 맞는 사례가 속출했다. 승선자 수부터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구조자와 실종자 명단이 수시로 오락가락했다. 하다못해 북한의 대외선전 웹사이트 ‘우리 민족끼리’로부터 “민중도 못 지키는 게 정부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 안전’을 국정목표로 내걸고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꿨으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라는 조직까지 갖췄다. 아울러 정부 부처 사이의 협업과 투명한 정보 공개를 강조한 ‘3.0 정부’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 대책본부의 대처 능력은 실망 그 자체였고, 협업은커녕 혼선만 연출했다. 정부가 선박 사고 대응을 위해 마련했다는 9가지 지침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어제 공개된 침몰 당시 교신록에 따르면 세월호 측은 “승객들을 탈출시킬지 빨리 결정하라”는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의 지시에 엉뚱한 소리만 반복하다가 교신이 끊긴 이후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배를 탈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 규정에는 여객선들이 10일마다 안전 훈련을 하도록 되어 있다.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등 관계 당국이 훈련 실시 여부를 감독하지 못한 책임도 크다.

선진국은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재난 대처 매뉴얼을 마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철저한 훈련과 점검을 반복한다. 매뉴얼은 갖춰져 있지만 이를 작동시킬 시스템이 죽어 있는 나라는 중진국이고, 매뉴얼조차 없는 나라는 후진국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지만 이 점에서는 중진국과 후진국의 어디쯤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여객선 침몰로 한국의 위기관리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꼬집었다. 나라의 국제적 위상과 신뢰도가 세월호처럼 침몰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경고다.

1993년 292명이 숨진 서해 훼리호 침몰 이후 21년이 경과했으나 정부의 대처는 나아진 게 없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월 16일을 ‘안전 국치일(國恥日·나라가 당한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한 날)’로 삼아야 한다. 이번에도 국가적인 안전 관리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만들지 못한다면 선진국 진입은 요원해지고 똑같은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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