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실로 출근하는 前은행지점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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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자격증 7개 따고 재취업한 이만호씨

이만호 씨가 16일 서울 국민은행 본점 기계실에서 설비를 조작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만호 씨가 16일 서울 국민은행 본점 기계실에서 설비를 조작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잘나가는 시중은행 지점장이었던 이만호 씨(58)는 2010년 10월 명예퇴직으로 30년 넘게 일하던 은행을 나왔다. 노후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던 그는 교통비도 절약할 겸 안 쓰던 자전거를 고치기 위해 동네 자전거 수리점을 찾았다.

일흔이 다 된 수리점 주인은 그에게 “40년 동안 수리점을 운영했는데 큰돈은 못 벌었지만 자식들 교육과 결혼을 다 시켰고 작은 건물도 구입했다”며 “은퇴할 일도 없고 자식들에게 손 벌릴 일도 없다”고 말했다. 이 씨는 그 자리에서 ‘30년 가까이 남은 인생을 잘 보내려면 반드시 기술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각오는 섰지만 실행은 쉽지 않았다. 이듬해 3월 직업전문학교의 보일러기능사 과정에 입학했지만 생소한 용어를 익히느라 머리를 싸매야 했다. 주변에서 ‘나이 들어 무슨 기술이냐’ ‘등산모임이나 같이 하자’라며 만류했지만 이 씨는 굴하지 않고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몇몇 회사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가 왔지만 그럴 때마다 “가면 2, 3년은 대우를 잘 받겠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이후의 삶이고 그걸 생각하면 내가 선택한 길이 맞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결국 이 씨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공조냉동기능사, 에너지관리산업기사 등 모두 7개의 자격증을 땄다. 그는 “에너지관리산업기사의 경우 2011년에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었지만 끝까지 노력한 끝에 2012년 4명의 합격자 안에 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점수도 60점으로 딱 커트라인에 걸렸다.

7개의 자격증을 가진 이 씨였지만 취업은 또 다른 난관이었다. 서류전형에 합격해도 면접을 보면 나이 때문에 퇴짜를 맞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컨설팅도 받고 취업박람회도 참석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끝에 올해 2월 한 은행의 시설관리업체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가 나왔던 바로 그 은행이었다. 그는 요즘 말단 기계원으로 아들뻘인 동료들과 함께 보일러·공조·냉방 시설을 관리하고 있다.

이 씨는 “성공적인 재취업을 위해서는 자신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월급을 얼마 받았는지에 대한 기억을 먼저 버려야 한다”며 “눈높이를 낮추고 준비하면 미래가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은퇴 후 기술을 배우면 개인이 행복하고 건전한 가정을 꾸릴 수 있으며 나라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씨의 수기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가 주관한 ‘제3회 중장년 재취업 성공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이만호#은행 지점장#보일러기능사#자격증#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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