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23년 삶 마감하는 ‘영세상인의 단짝’ 다마스-라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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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버리려던 그때 ‘마’음 잡고 ‘스’스로 서게 해 준 차인데…

3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세탁소 앞에서 김도현 현대통합물류운송 대표(왼쪽)와 김재남 관리이사가 다마스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김 대표는 1998년부터 16년째 다마스를 타고 있다. 사진 속 다마스는 김 대표의 업무차량이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3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세탁소 앞에서 김도현 현대통합물류운송 대표(왼쪽)와 김재남 관리이사가 다마스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김 대표는 1998년부터 16년째 다마스를 타고 있다. 사진 속 다마스는 김 대표의 업무차량이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1998년 어느 겨울날. 한 청년이 새벽부터 세차도구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아파트 주차장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차 한 대를 닦고 나면 손이 꽁꽁 얼어붙었다. 청년은 추위를 견디기 힘겨워지면 작은 승합차 안으로 뛰어 들어가 몸을 녹였다. 차 이름은 ‘다마스’. 스페인어로 좋은 친구라는 뜻이다. 군 복무를 갓 마친 김도현 씨(당시 24세)에게는 유일한 밑천이었다.

김 씨는 복학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외환위기로 잘나가던 대기업에 취직한 선배들은 하나둘씩 직장을 잃었다. 친구들은 고시 공부에 매달리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주식 투자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봤다. 부모님이 김 씨의 빚 3000만 원을 대신 갚았다. 면목이 없었다. “차라리 사업이나 해볼까.” 김 씨는 매일같이 PC통신 ‘하이텔’에 접속해 중고차 게시판을 뒤졌다. 차를 몰고 주차장을 돌아다니며 세차를 해 돈을 벌 생각이었다.

전 재산 200만 원을 털어 차 구입에 나섰다. 고를 수 있는 차는 많지 않았다. 싸고 짐도 많이 들어가는 차가 필요했다. 선택은 대우자동차(현 한국GM)의 경상용차 다마스 1996년형. 주행거리 2만 km 정도의 멀쩡한 차를 새 차의 반값 수준에 구했다. “이 차로 새 인생을 시작하자.” 김 씨는 투박한 파란색 다마스를 마주한 날을 잊지 못한다.

반년 남짓 세차 일을 하던 김 씨는 더 좋은 벌이가 없을까를 고민했다. 길에서 주운 생활정보지의 구인광고를 뒤졌다.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다마스 갖고 계신 분. 열심히만 하면 월수입 250만 원 보장.’ 김 씨는 곧장 퀵서비스 업체로 찾아갔다. 부부가 운영하던 조그만 회사였다. “내일부터 나와.” 심드렁한 한마디에 김 씨는 배달기사가 됐다.

퀵서비스 일은 보람이 있었다. 다마스 운전대를 잡고 거래처를 오가는 일상이 계속됐다. 운전은 조금 서툴렀지만 부지런히 시간에 맞춰 손님들에게 물건을 건넸다. 하루 일한 수당은 퇴근할 때 바로 받을 수 있었다. 김 씨는 “참으로 정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1년만 더 하자”던 생각이 2008년까지 이어졌다. 대학에서는 2000년에 제적됐다. 미련은 없었다.

배달기사로 일한 지 10년째에 김 씨는 자신이 일하던 퀵서비스 업체를 인수했다. 전임 사장은 노름 빚을 크게 졌다. 주식으로 큰 손해를 본 경험이 있는 김 씨는 저축통장을 불리는 게 낙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장은 곧잘 손을 벌렸다. 사장의 빚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사장은 채무변제 조건으로 김 씨에게 회사를 넘겼다.

김 씨는 이를 악물고 회사를 키웠다. 하루도 수당 주는 것을 미루지 않았다. 배달기사들은 젊은 사장에게 믿음을 가졌다. 처음에 열 명 남짓이던 배달기사 수는 순식간에 늘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2011년 김 씨는 다마스와 경형 트럭 ‘라보’를 100대 장만해 기업물류 전문 운송업체를 차렸다. “이제야 일이 풀리는구나.” 젊은 사업가의 꿈은 하루가 다르게 영글었다.

“한국GM이 올해 말 다마스와 라보의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내년부터 적용되는 배기가스 규제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자 회사는….” 어느 날 접한 뉴스. 김 씨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당장 별일이 있기야 하겠냐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배달용 다마스는 한 달에 1만 km 정도를 달린다. 적어도 2년에 한 번씩은 차를 바꿔야 한다.

고민에 빠진 것은 김 씨뿐이 아니었다. 다마스를 타고 골목길을 누비던 세탁소 주인과 길에서 먹을거리를 파는 상인들, 이 차를 생계수단으로 삼던 수많은 소상공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와대와 국민권익위원회에는 용달차 운송사업연합회, 한국세탁업중앙회 등 소상공인 협회들이 보낸 청원서가 줄을 이었다. 다마스의 생산 중단은 ‘손톱 밑 가시’의 대표적인 사례로 관심을 모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나온 지 23년이 지난 차 한 대가 없어지는 게 그렇게나 큰 사건일까. 대안은 없을까. 다마스는 서민들의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었던 걸까.

‘영세상인의 동반자’, 생산 중단되는 배경

3일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범진술 씨(60)가 다마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범 씨는 “10년 동안 돈을 벌어준 효자 자동차”라며 다마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3일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범진술 씨(60)가 다마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범 씨는 “10년 동안 돈을 벌어준 효자 자동차”라며 다마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차가 아니라 내 삶의 동반자예요.”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서 23년간 세탁소를 운영해 온 왕봉옥 씨(55) 말이다. 왕 씨는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주문을 받으면 다마스를 몰고 세탁물을 수거해 온다. 인근 합정동과 아현동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 왕 씨는 1990년대 중반부터 다마스를 타고 있다. 지금 타는 차는 두 번째다. 그는 “좁은 골목길을 다니기에 이 차만큼 좋은 게 없다”고 말했다.

“값을 좀 올리더라도 계속 만들어 주면 좋을 텐데….”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서 세탁소를 하는 범진술 씨(60)도 다마스의 생산 중단을 안타까워하는 이들 중 하나다. 그는 “다마스는 기름이 적게 들고 자동차세도 싸서 실용적”이라며 “오토바이는 비가 오면 세탁물이 젖어 탈 수가 없고 영업용 소형트럭은 값이 비싸다”고 말했다. 다마스는 새 차 가격이 904만∼946만 원. 1t 트럭은 1300만∼1800만 원대다.

다마스와 라보는 휘발유나 경유에 비해 저렴한 액화석유가스(LPG)를 연료로 사용한다. 배기량은 796cc로 경차에 해당해 등록세와 취득세를 감면받을 수 있고 고속도로 통행료나 공영주차장 주차료도 50% 할인된다. 저렴한 차 가격에 유지비도 적게 들어 자영업자들에게 오랜 기간 인기를 끌어 왔다.

다마스와 라보의 생산이 중단되는 것은 점차 엄격해지는 자동차 배기가스 배출량과 안전성 기준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전 차종에 배출가스 자기진단장치(OBD-2)의 부착을 의무화했다. OBD-2는 배출가스 관련 장치의 오류, 고장 시 운전자에게 이상 유무를 표시하는 장치다. 또 내년부터 판매되는 모든 차에는 추돌 시 운전자 보호를 위한 머리지지대를 설치해야 한다. 2015년부터는 타이어 공기압경보장치와 차체자세제어장치도 달아야 한다. 차에 반드시 장착해야 하는 장치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이다.

다마스와 라보는 이러한 기준을 충족시키기에는 원가 부담이 너무 커서 생산 중단이 불가피하다는 게 한국GM 측 설명이다. 한국GM 관계자는 “다마스와 라보의 차체 구조상 막대한 개발비를 투자하지 않으면 해당 장치들을 추가하기 어렵다”며 “이들 차종의 마진을 감안할 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생산 중단을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GM은 올해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다마스와 라보의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

다마스와 라보는 2007년에도 강화된 배기가스 허용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1년여간 생산이 중단된 바 있다. 회사 측은 “당시에도 적지 않은 금액을 투자해 환경규제에 대응해 2008년부터 생산을 재개했다”며 “더이상 추가 투자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차 가격을 올려서라도 팔아 달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용환 전국 용달화물차 운송사업연합회 회장은 “채산성이 안 맞으면 차량 값을 올려서라도 생산했으면 하는 게 영세상인들의 바람”이라며 “환경 관련 규제도 정부에서 시간을 두고 유연성 있게 대처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협회에 따르면 다마스와 라보를 사용하는 용달차 사업자는 2만여 명이다.

다마스 판매왕의 탄식

“4년여간 다마스를 400대쯤 팔았습니다. 이 차를 찾는 사람들 사정이 하나같이 얼마나 딱한지….” 한국GM 가락영업소 송병기 부장(47)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자동차 영업사원이 됐다. 노래방을 운영하던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자녀들이 떳떳하게 소개할 수 있는 직업을 원했다.

2009년 송 부장이 영업사원이 된 후 가장 먼저 팔았던 차가 다마스다. 워낙 원하는 사람이 많아 어렵지 않게 첫 계약을 따냈다. 그는 다마스를 자신의 ‘전략 상품’으로 삼았다.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퀵서비스 업체를 돌아다니며 차를 팔았다. 넥타이와 정장 대신 작업복 차림을 고집했다. 그는 2010년 250여 대의 차를 팔아 한국GM ‘판매왕’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판매한 차 중 절반 이상이 다마스였다.

사실 영업사원 입장에서 다마스를 주력으로 파는 건 수지가 안 맞는 장사다. 상용차를 팔기 위해 처리해야 하는 서류는 일반 승용차의 두 배다. 상용차용 번호판을 받는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영업수당도 승용차에 비해 낮은 편이다.

다마스를 찾는 사람들 중 한 번에 현금을 내고 차를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신용등급이 낮아 할부 승인이 안 되는 이들은 ‘어떻게든 차를 사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겨우 차를 산 사람들은 탁송료 25만 원을 아끼기 위해 서울에서 창원공장으로 차를 직접 찾으러 내려갔다.

다마스를 팔며 송 부장은 매일같이 절박함과 만났다. 재산과 직장을 잃은 이들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게 송 부장의 보람이었다. 3년 만에 30만 km를 뛴 용달업자가 “차 바꿀 때가 됐다”며 찾아와 웃을 땐 가슴이 벅찼다.

송 부장은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지난 4년여간 다마스를 팔며 맺은 인연들이다. 검색어에 ‘다’만 쳐 넣어도 100여 명의 연락처가 나왔다.

“허탈할 뿐이죠. 생산 중단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동안 차를 사갔던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타는 차인데, 그걸 뺏어가는 건… 그건 정말 아니지 않나요?”

단종 소식에 판매 늘어… 중고값 폭등·역수입도 가능

올 1월 한국GM이 생산 중단 방침을 밝힌 뒤 다마스와 라보 판매량은 급격히 늘고 있다. 다마스는 올 들어 8월 말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9% 늘어난 6484대, 라보는 42.1% 증가한 3493대가 팔렸다.

중고차도 불티나게 팔린다. 중고차 업체 SK엔카에 따르면 올 들어 8월까지 거래된 다마스 중고차는 지난해보다 144.8% 늘어난 3755대, 라보는 29.7% 증가한 1169대였다. 박홍규 SK엔카 인터넷사업본부장은 “단종을 앞두고 중고차 매물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었다”며 “판매가 중단되는 내년부터는 시세가 크게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고차 업자들은 다마스가 해외에서 역수입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GM의 우즈베키스탄 현지 생산법인인 GM우즈베크는 한국에서 부품을 수입해 다마스를 만들고 있다. 다마스를 대체할 차가 마땅치 않은 만큼 수요는 충분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통관과 형식승인 절차가 까다로워 개인이 다마스를 해외에서 들여오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연말로 예정된 다마스와 라보의 생산 중단을 철회해 달라는 소상공인들의 목소리는 나날이 커져 가고 있다. 전국 용달화물차 운송사업연합회, 한국세탁업중앙회, 전국유통상인연합회 등 11개 시민단체가 참여해 설립한 ‘생계형 경상용차 단종 철회 청원자 협의회’는 3일 한국GM 부평공장을 찾아가 회사 관계자들에게 다마스와 라보를 계속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경상용차 시장을 살리기 위한 특별법 제정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GM과 국토교통부 등 관련 부처는 여전히 난색을 표하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며 소상공인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이진석·김호경 기자 gene@donga.com
#다마스#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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