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학,장르를 박차다]<6>소설가 염승숙 씨

  • 입력 2009년 7월 27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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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환상만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없다”는 ‘환상 예찬론자’인 소설가 염승숙 씨. 그는 차세대 작가인 동시에 열렬한 한국소설 마니아다. 박영대 기자
“상상과 환상만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없다”는 ‘환상 예찬론자’인 소설가 염승숙 씨. 그는 차세대 작가인 동시에 열렬한 한국소설 마니아다. 박영대 기자
한손엔 필사노트, 한손엔 사전
“내 소설의 원동력은 우리 문학”

“한국문학은 재미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동백꽃’ ‘봄봄’ 외에 아는 김유정의 다른 작품이 있는지,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외에 읽어본 전상국 작가의 다른 작품이 있는지를. 그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의 의미는 줄줄 읊으면서도 시 감상은 못하거나, 점순이(‘동백꽃’ ‘봄봄’의 등장인물)까지만 알고 그 이상은 모르면서 우리 문학이 지루하다고 단정 짓는 건 안타깝다”고 말한다. 한국문학에 대한 그의 ‘네버엔딩(never ending)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됐다.

최근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한 북카페에서 만난 염승숙 작가(27). 조곤조곤한 말투에 아담한 체구, 학생처럼 단정한 옷차림의 그는 인터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뭘 어떻게 말해야 하나”라며 쑥스러워했다. 하지만 한국문학 이야기가 나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문학의 명작과 작가론에 대해 청산유수로 읊어대는 그의 눈빛은 교재를 펼치고 강의실 맨 앞줄에 앉은 모범생처럼 반짝였다.

한국문학 ‘그 이상’을 모르면서 ‘재미없다’ 말하는 게 안타까워
환상-우화 기법 통해 이 시대의 다양한 삶 그릴 것

지난해 말 거침없는 환상 세계로 주목받은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을 펴낸 작가에게 “한국문학은 소설을 쓰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한다. 소설을 읽으며 “명백히 또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를 누군가 ‘몽창’ 떨어뜨렸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그는 직접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동국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한국문학의 깊고 광대한 세계 속에 빠졌다. 그는 인터뷰 내내 ‘이범선, 오상원 등의 전후세대 작가들의 탁월함’, ‘태평양전쟁 직전에 발표된 작품들의 흥미로운 요소’ 등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거나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등의 문구를 불쑥 내뱉으며 감탄했다.

“저도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즐겨 읽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오면서 일제강점기의 작품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그때 한국문학이 재미있단 걸 처음 알았어요. 시대별, 작가별로 개성이 뚜렷하고 제가 발붙이고 살고 있지만 경험해볼 수 없었던 시대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었어요. 날 새는지도 모르고 읽었죠.”

숙독한 작품을 필사하는 건 기본. “문장을 베껴 적다가 거기서 새 아이디어가 떠오를 정도가 되면 필사의 경지에 오른 것”이란다. 잊혀지거나 잘 쓰이지 않는 한국어를 작품 속에 녹여내 대중화하는 것 역시 작가의 책무라는 생각 때문에 사전 찾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도당오도당’(작고 단단한 물건이 떨어지며 나는 소리) 등의 신기한 단어들을 발굴해 작품에 녹여내는 즐거움에 하루 온종일 사전을 뒤적인 날도 많았다. 한 손에는 필사노트를, 다른 한 손에는 사전을 들고 도서관에서 은거한 덕분에 2학년 때 교내 주요 문학상을 모두 휩쓸었고 3학년 재학 중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2005년 등단했다.

그의 작품에는 빚쟁이를 피해 달력 속으로 들어가는 엄마(‘춤추는 핀업 걸’), 공룡으로 역(逆)진화하는 시청 공무원(‘거인이 온다’) 등의 환상적이고 우화적인 기법들이 즐겨 쓰인다. 흔히 세대적 특징이나 장르문학의 영향으로 이해되는 이런 요소들 역시 작가는 한국문학의 전통 속에서 뿌리를 찾는다.

“이상, 박태원의 작품처럼 거리로 내몰리고 방향을 알 수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청춘의 모습은 오늘도 똑같아요. 암울한 시대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 안에는 유머, 위트, 환상이나 우화적인 기법들이 쓰였어요. 저도 작품 속에서 비극적이고 슬픈 현실을 다루더라도 이런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첫 소설집을 펴낼 무렵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한국문학 이야기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아 작가로서의 포부를 묻자 그는 “이 시대에 누가 살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폭넓게 그려내고 싶다”더니 조심스레 덧붙였다. “사실 이런 말 하면 사람들이 귓등으로도 안 듣던데(웃음)… 지금까지 읽은 한국문학 작품들의 손톱만큼이라도 따라가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모범생다운 첨언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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