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인터뷰]2002 노벨 물리학상 수상 고시바 마사토시 교수

  • 입력 2008년 1월 5일 02시 55분


코멘트
일본 혼슈 기후 현에 위치한 소립자 관측 장치 앞에서 고시바 마사토시 교수(오른쪽 두 번째)가 아키히토 일왕 부부에게 뉴트리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일본 혼슈 기후 현에 위치한 소립자 관측 장치 앞에서 고시바 마사토시 교수(오른쪽 두 번째)가 아키히토 일왕 부부에게 뉴트리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고시바 마사토시 교수(가운데)가 지방의 한 과학문화센터에서 강연을 마친 뒤 휠체어에 앉아 학생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고시바 마사토시 교수(가운데)가 지방의 한 과학문화센터에서 강연을 마친 뒤 휠체어에 앉아 학생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일본 도쿄(東京)대 혼고(本鄕) 캠퍼스 이학부 1호관의 ‘고시바홀’. 로비 구석에 지팡이를 짚은 작달막한 노인의 실물 크기 사진이 입간판처럼 서 있다. 200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81) 교수.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고, 도쿄대 진학 후에는 생활비를 버느라 물리학과를 꼴찌로 졸업하는 등 숱한 역경을 딛고 뉴트리노(중성미자·소립자의 일종) 천문학을 창시한 천체물리학자다. 12월의 싸늘한 날씨가 걱정스러웠을까. 누군가가 사진의 목에 둘러준 털목도리에서 교수를 향한 도쿄대인들의 애정과 존경이 느껴졌다. 지난해 12월 10일 이 건물 10층의 연구실에서 고시바 교수를 만났다. 말투가 느린 듯하면서도 간결한 그는 물리학계의 거인이라기보다 옛날 얘기를 해 주는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정부가 기초과학 일으켜야 부자나라 된다

―뵙게 돼 반갑습니다. 고령에도 교육문제나 기초과학 지원에 대해 발언을 계속하고 계십니다만 초등학생들을 위해 지방 강연도 자주 다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연간 100회 정도 강연을 합니다. 학생들을 위한 강연 요청은 거절하지 않습니다. 젊은이에게 ‘기초과학도 진지하게 하면 보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죠. 2003년 헤이세이(平成) 기초과학재단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소아마비와 가난 등 남다른 역경이 많았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역시 소아마비였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1학년 가을에 발병해 연말에야 퇴원했는데 팔다리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습니다. 퇴원하고 얼마 뒤 학교에 가다가 길에서 넘어졌는데 혼자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난 뒤 쳐다본 하늘이 눈물로 얼룩져 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내가 살아온 동력은 ‘이까짓 것’ 하는 반골정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들이 우습게 보는 것 같으면 어디선가 ‘난 할 수 있다’는 ‘오기’가 끓어 오릅니다. 3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안심하고 의지할 사람은 없다고,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랐죠. 도쿄대 물리학과도 고교시절 기숙사에서 다른 사람들이 ‘고시바의 성적으로는 물리학과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는 걸 우연히 들은 뒤 이를 악물고 공부해 진학한 겁니다.”

―한국에도 ‘하면 된다’ 정신이 있는데…. 그럼 당초 물리학에 대한 애정이 있던 건 아니었나요.

“물리학에 대해 ‘해 볼 만하다’고 느낀 건 한참 뒤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갈 곳이 없어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선배 물리학자가 함께 실험을 해 보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스스로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가운데 ‘이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뒤 평생 소립자 실험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가능한 한 여러 가지를 스스로 경험해 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인지,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선생의 발견은 과학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요즘은 과학에 대해서도 돈이 되느냐를 따지는 추세지만 내 연구는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뉴트리노를 연구하면 지구 탄생의 비밀을 풀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뉴턴의 역학도 당장 돈이 되지는 않았죠. 1897년 영국의 톰슨이 전자를 발견했을 때 수십 년 뒤 전자산업이 그토록 융성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1932년 미국의 앤더슨이 우주선에서 발견한 양전자는 지금 암세포를 읽어 내는 양전자단층촬영(PET) 검사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소립자를 통해 우주 생성을 이해하게 되면 언젠가는 산업에서도 활용하게 될 겁니다. 이뿐만 아니라 기초과학은 인류 공통의 지적재산에 기여합니다.”

―초신성 뉴트리노의 첫 관측에 대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연도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 아닐까요.

“좋은 지적입니다. 이웃 은하에서 17만 년 전 폭발한 초신성의 뉴트리노가 17만 년 걸려 지구에 도착한 것을 발견한 것은 행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걸 관측하기 위해 수십 년간 준비를 해 왔습니다. 뉴트리노는 세계 60억 명 모두에게 왔지만 우리만이 관측 준비를 해 뒀던 겁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당시 4억7000만 엔을 들여 기후(岐阜) 현의 가미오카 폐광에 관측장비를 만들었고 예산 부족으로 악전고투했다는데….

“그래도 정부 지원만 받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국가는 국가밖에 할 수 없는 기초과학에 진지하게 지원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입니다. 나는 도쿄대 법인화에 적극 찬성했지만 산학협력 중심으로 가다 보니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어 걱정이 많습니다. 하지만 국가에 미래가 있으려면 적어도 국내총생산(GDP)의 몇 %는 기초과학에 투자한다는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교수님의 지론과는 정반대로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한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조사에서 일본 학생들이 과학이나 수학에 대한 학습의욕이 최저 수준으로 나왔습니다. ‘유토리 교육’의 탓을 많이 듭니다만….

“예전부터 교육학자인 친구에게 ‘당신은 참 마음 편하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무슨 주장을 하건 결과는 25년 뒤에나 나타나니까요(웃음). ‘주입식 교육은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수업시간을 줄여 자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주자’는 취지는 좋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일생에서 기억력이 특별히 좋은 시기가 따로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중학교에 해당하는 10∼15세는 기억력이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두뇌의 효율이 좋을 때 외국어건 수학이건 기초학문을 다져 둬야 합니다. 지금 내 나이에 새로 구구단을 외우려 한다면 어디 되겠습니까.”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기초과학 이탈 현상이 심각합니다.

“학생들이 과학을 좋아하게 하려면 교사 스스로가 과학에 매력을 느껴야 합니다. 적어도 과학 과목은 자기 스스로가 잘 알고 좋아하는 교사가 가르쳐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들을 문과전문과 이과전문으로 나눠 과목에 따라 상대방 학급을 가르치는 시도라도 해야 합니다. 4년 전 문부과학성 후배에게 국립대 이과계 졸업자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대신 졸업 뒤 공립학교에서 1년 정도 일하게 하라는 아이디어를 준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도 시행하겠다고 하더군요.”

―한국에는 아직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시아권에 세계 최대의 공동과학연구소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연세대와 서울대 초청으로 가 본 한국에서 젊은 학자들의 진지함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21세기에는 기초과학에서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기여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힘을 결집할 장소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일본만으로는 세계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한국만으로도 무리 아닙니까.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은 엄청난 인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10명 중에 한 명 선발하는 인재를 저쪽은 100명 중에서 골라낸다는 얘깁니다. 상당히 필사적으로 해야 할 뿐 아니라 협력 관계도 쌓아 나가야 합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 고시바 마사토시는

중성미자 최초로 관측…우주로 향한 새 창 열어

우주에서 날아온 뉴트리노(중성미자)와 X선을 처음 관측해 ‘우주로 향하는 새 창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 천체물리학자. 그는 이 공로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레이먼드 데이비스 2세 등 2명과 함께 200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중학생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거동이 불편해졌다. 대학 시절에는 가족의 생활비와 형제의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바람에 도쿄대 물리학과를 꼴찌로 졸업하는 등 역경을 겪었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의 어려움을 훌륭히 극복하고 성취를 이룬 의지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벨상 수상 뒤엔 2003년 헤이세이 기초과학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아 온 경력이 있다. ‘국민 1인당 연간 1엔씩 내서 기초과학을 지원하자’며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에 만년(晩年)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약력:

1926년 9월 아이치(愛知) 현 출생

1951년 도쿄대 물리학과 졸업

1955년 미국 로체스터대 물리학 박사

1955년 미국 시카고대 연구원

1958년 도쿄대 원자핵연구소 조교수

1970년 도쿄대 물리학부 교수

1983년 도쿄대 이학부 소립자물리국제연구센터장

1987년 도쿄대 명예교수, 도카이(東海)대 이학부 교수(1997년까지)

1989년 일본학사원상, 브루노 로시상(미국 물리학회)

1997년 훔볼트상(독일 훔볼트재단), 문화훈장

2000년 울프상 물리학 부문(이스라엘)

2002년 노벨 물리학상, 일본학사원 회원

2003년 벤저민 프랭클린 메달(미국 프랭클린협회)

2005년 도쿄대 특별명예교수, 재단법인 헤이세이 기초과학재단 이사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