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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美뉴욕 아티카교도소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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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美뉴욕 아티카교도소 폭동

입력 2006-09-09 03:03수정 2009-10-0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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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주 아티카 교도소.

샌프란시스코 만의 앨커트래즈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교도소로 꼽히던 이곳에서 1971년 9월 9일 폭동이 일어났다. 살인 강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복역 중이던 1200여 명의 죄수는 교도관 20명을 인질로 잡고 교도소를 점거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민권운동의 열기가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교도소 담장 안까지 밀어닥쳤다.

‘일주일에 한 번 샤워하게 해 달라,’ ‘한 달에 한 통씩 지급되는 화장실 휴지를 늘려 달라.’

그들이 요구한 것은 기본적인 권리 보장이었다.

넬슨 록펠러 뉴욕 주지사는 버텼다. 미국 석유왕 존 록펠러의 손자였던 그는 협상을 위해 현장으로 오라는 죄수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가 아닌 제3세계로 망명하게 해 달라.” 대치 상황이 계속되면서 죄수들의 요구사항도 과격하게 변했다.

나흘이 흘렀다. 13일 록펠러 주지사는 협상 중단을 선언했다. 무력 진압 명령이 떨어졌다. 진압 시간은 5, 6분에 불과했지만 교도관 11명을 포함해 43명이 죽었다. 미 역사상 가장 피해가 큰 교도소 폭동 사건이었다.

죄수들을 기다린 것은 잔인한 보복이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을 발가벗겨 깨진 유리조각 위를 기어 다니게 했다.

1년 후 미 정부 특별위원회가 발표한 ‘아티카 폭동 보고서’는 진압 방식이 적절치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진압을 명령했던 록펠러 주지사는 얼마 뒤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부통령에 임명됐다.

아티카 폭동 이후 재소자 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갱생보다는 처벌에 중점을 둔 교정 시스템의 근본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폭동 당시 20만 명이던 미국 재소자는 현재 200만 명으로 늘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죽음인가. 그들은 숨 막히는 곳에서 살고 있네. 그들이 슬픔 속에 죽어가도록 놔둬선 안돼. 그들에게 성장할 기회를 줍시다. 해방시켜 줍시다.’

폭동이 일어난 이듬해 비틀스 출신의 존 레넌은 ‘아티카 주립 교도소’라는 곡을 발표했다.

그는 1980년 마크 채프먼이라는 젊은이가 쏜 총알에 목숨을 잃었다. 채프먼은 지금 26년째 감옥에 갇혀 있다. 바로 그 아티카 교도소에서….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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