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66년 佛선교사 베르뇌주교 순교

  • 입력 2006년 3월 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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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장에 이르자 형리들은 주교와 세 신부의 옷을 벗겼다. 이어 사형 선고문의 낭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형벌을 받는 동안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망나니의 두 번째 칼날에 당년 52세인 장 주교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새남터 형장의 군인 박베드로의 증언)

한국 천주교 사상 최대의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가 본격화된 1866년 3월 4일. 전국에 배포된 천주교 서적과 그 판본(板本) 일체를 압수하여 불태우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미 잡혀 온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었던 장 베르뇌(장경일·張敬一) 주교와 3명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에 대한 신문이 시작됐다.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귀를 접어 화살로 꿰뚫고, 얼굴에 생석회를 뿌려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등의 고문을 당한 끝에 7일 군문효수(軍門梟首)형에 처해졌다.

병인박해에서 용케 살아남은 3명의 선교사 중 리델 신부는 탈출에 성공해 중국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다. 대원군은 이후 1873년 실각 때까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계속해 이 기간에 8000∼2만여 명의 신자가 처형당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프랑스 르망 교구 출신인 베르뇌 주교는 1837년 사제품을 받은 뒤 베트남으로 건너가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다행히 풀려나 만주 랴오둥(遼東) 지방에서 10여 년간 활동했다. 1856년 서울에 들어온 그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배론 성지)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두 개의 인쇄소를 설립하는 등 10년간 열정적인 사목 활동을 펼쳤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1대 브뤼기에르 주교부터 9대 라리보 주교까지 모두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교구장을 맡았다. 조선에 주로 선교사를 파견했던 파리외방전교회는 ‘순교대학’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에서 활동한 총 170명의 신부 중 25명이 순교했고, 한국의 103위 성인 중에도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신부 10명이 포함됐다.

한국 천주교는 1942년 12월 20일 노기남(盧基南) 대주교를 최초의 한국인 서울대교구장으로 맞았다. 이후 1969년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에 이어 37년 만에 지난달 정진석(鄭鎭奭) 서울대교구장이 두 번째 한국인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두 명의 추기경 시대를 맞은 한국 천주교도 눈을 외부로 돌려 북한과 아시아 선교에 책임을 다해야 할 때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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