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찜쪄먹기]과학만능주의 비판 '멋진신세계'

  • 입력 2000년 10월 11일 13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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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 노동자 대량생산 시스템

지금으로부터 약 6백년 뒤의 미래. 세계는 10명의 총독들이 나누어 지배하고 있으며, 이 소설의 무대는 서부 유럽지구에 속하는 런던이다. 정부는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세가지 표어 아래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을 이용해 사람들을 통치하고 있다.

신세계는 부모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자연출생이 없어진지 오래이며 미리 정해진 계획에 의해 공장에서 부화될 따름이다. 태아들은 출생 전에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5등급으로 분류돼 수면학습법 등을 통해 철저하게 계급적으로 차별된 교육을 받는다.

알파와 베타는 최상층 지배계급으로서 충분한 영양 공급을 받아 정상적으로 발육한다. 하지만 그 이하 계급의 태아들은 ‘보카노프스키 방법’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영양분 미달로 인해 난쟁이처럼 왜소한 신체를 갖고 태어나 노동자의 길을 걷는다.

이들은 태아세포 하나를 계속 분열시키는 방식을 통해 수백명의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들로 생산된다. 이렇게 대량생산된 노동자들은 나중에 똑같은 공정을 가진 공장들에 투입된다. 이들은 유아시절에 파블로프식의 조건반사 교육법으로 책이나 지성을 두려워하도록 철저하게 세뇌당한다.

성인들의 오락은 ‘소마’라는 환각제와 가상체험 극장, 그리고 임신의 위험이 전혀 없는 자유연애로 해결되며, 누구나 여행의 자유를 누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버나드 마르크스와 레니나 크로운이라는 남녀. 버나드는 알파 계급이지만 출생할 당시 아기공장의 실수로 왜소한 체구와 지나치게 민감한 감수성을 지니게 된 사람이다. 결국 그는 개성이 말살된 세상에서 ‘자아의 정체성’이라는 실존적 고뇌에 빠진 문제아로 살아간다. 한편 버나드의 동료인 레니나는 전형적인 알파 계급의 건강한 미인.

두사람은 어느날 뉴멕시코 부근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견학여행을 갔다가 문명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여러가지 갈등이며 고통, 투쟁, 질병 따위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다가 그곳에 사는 존이라는 백인 청년을 만나는데, 사실 그는 야만인이 아니라 문명세계에서 온 여자의 자식이었다. 존의 아버지는 인공부화 및 습성형성국의 책임자였는데, 린다라는 여성과 보호구역에 놀러왔다가 린다가 계곡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자 그냥 버려두고 떠났다. 그러나 린다는 인디언들에게 구조돼 그들의 보살핌으로 존을 낳게 된 것이다.

문명세계의 지배계급 생활에 익숙해 있던 린다는 인디안 보호구역에서도 자유연애를 하고 육체노동을 피하다가 인디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비참하게 생활한다. 그러나 버나드와 레니나의 등장으로 자신과 아들이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마침내 서부유럽 총독인 무스타파 몬드의 허락이 떨어져서 버나드 일행은 이들 모자를 다시 런던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존은 어려서부터 문명세계를 동경해 왔지만 인간적으로 메마른 신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그는 아름다운 레니나의 자태에 매혹돼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문명세계 식으로 육체관계만을 가지려 할 뿐이다. 도덕적 관념이 강했던 존은 레니나의 태도에 격노하고 만다.

이즈음 존의 어머니 린다도 문명세계에 다시 재적응하지 못하고 소마의 과다복용으로 사망해버린다. 그러자 존은 신세계에 사고의 전환을 일으키고자 결심한다. 그는 델타 계급의 노동자들을 설득해 자유를 요구하는 폭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폭동은 이내 진압되고, 존과 버나드는 무스타파에게 불려가서 추궁을 당한다. 그들은 신세계의 질서와 인간의 진정한 정신적 자유 등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결국 버나드는 아이슬랜드로 추방되고, 존은 런던을 떠나 외딴 등대로 가서 은둔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문명사회는 그런 그를 내버려두지 않고 여러가지 대중매체를 동원해 끊임없이 조롱거리로 삼는다. 시달리다 못한 존은 자신을 찾아온 사랑하는 여인 레니나를 죽인 다음 스스로 목을 매고 만다.

◇풍자와 실험정신의 대가 올더스 헉슬리

1894년 영국 서레이에서 태어나 1963년 미국 LA에서 작고한 작가이자 평론가. 그는 저명한 생물학자인 T.H. 헉슬리의 손자이며, 형제들인 줄리언 헉슬리와 앤드류 헉슬리(1963년 노벨의학상 수상) 역시 유명한 생물학자이다.

헉슬리는 명문인 이튼 칼리지를 다녔는데, 이때 각막 염증으로 시력을 많이 잃었다. 옥스퍼드의 발리올 대학을 졸업한 뒤 잡지편집인으로 일하다가 1921년부터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돌아다니며 살다가 193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첫부인 마리아와는 1919년에 결혼했으며 1955년에 사별한 뒤 1956년에 로라와 재혼했다.

헉슬리는 오늘날 '멋진 신세계'(1932)의 작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작가로서 그의 재능이 가장 빛났던 시기는 1920년대로 평가된다. 이 시기에 발표한 소설 ‘대위법’(Point Counter Point, 1928)이 그의 최고작으로 일컬어진다. 이 소설 주인공 중 하나는 절친한 친구였던 작가 D.H. 로렌스를 모델로 삼았다.

다방면에 걸쳐 백과사전적 지식을 섭렵했던 그는 소설가로서 실험적 스타일을 즐겨 구사했으며 주로 풍자와 냉소적 입장을 취하는 편이었다. 그가 1937년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간 것은 영적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서였다고 알려진다.

'멋진 신세계' 이후 그가 발표한 유사한 소설 중에서 '원숭이와 본질'(Ape and Essence, 1948)은 서기 2018년을 배경으로 한 어두운 디스토피아 얘기다. 핵과 생물학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한 이후 겨우 온전하게 남은 뉴질랜드의 한 연구가가 미국을 방문한다. 그는 그곳에서 인간성과 과학이 완전히 붕괴되고 여성의 생식 기간마저도 일년에 2주일간 만으로 한정된 악몽같은 세상을 본다. 한편 1962년에 발표한 ‘섬’(Island)에서는 불교적 교리와 약물의 효과로 유토피아를 누리는 인도양의 한 섬나라를 묘사했지만, 설득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학만능주의 비판한 우화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처음 발표됐다. 제목 그대로 판단하면 유토피아를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된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작품이다. 과학만능주의를 풍자하려는 의도에서 집필된 하나의 우화로서 첫페이지만 읽어봐도 작가의 냉소적인 태도가 진하게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 속 시대배경이 ‘AF 642년’으로 설정된 것부터가 의미심장하다. AF란 After Ford인데, 여기서 Ford는 1908년경부터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채택해 자동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헨리 포드의 성이다. 즉 헉슬리는 이때를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은 원래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폭풍우’(The Tempest)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작품 5막 1장에서 미란다가 오랫만에 사람을 보자 반가워서 독백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대사 중에 포함된 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풍자된 과학만능주의는 과학기술 자체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도 극단적으로 변질된 미래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인류의 고전 중 하나로 두고두고 남아 경고의 메시지를 울릴 것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사는 가족 제도가 아예 붕괴되고 아이들은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생산된다는 점, 게다가 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계급이 이미 결정돼 태아 성숙 과정에서부터 여러가지 불평등한 교육을 주입받는다는 설정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성의 말살을 합리와 이성이라며 찬양하고 신봉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미래의 여러 기술들 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필리'(feelie)라고 부르는 극장이다. 이곳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촉각까지도 재생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가상현실을 묘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멋진 신세계'는 1980년과 1998년에 각각 TV용 영화로 제작된 바 있으며 1980년판은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됐다. 한편 헉슬리는 1958년에 낸 ‘다시 가본 멋진 신세계’라는 에세이집에서 원작의 여러 주제들을 반추해보기도 했다.

박상준(SF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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