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는 세상]「무지개전화」 간사 오화선씨

  • 입력 1999년 9월 11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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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고급 승용차와 화려한 저택을 가졌던 ‘여사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영화’를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쳤다. ‘어둠 속에 사는 이들’의 ‘지팡이’ 노릇이 너무 행복하다며.

5만명 시각장애인의 ‘심부름꾼’노릇을 하고 있는 ‘무지개 전화’의 간사 오화선(吳和仙·39)씨. 한때 서울 강남의 화려한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장애인을 도우며 살아가는 ‘소설속의 주인공’같은 사람이다. ‘무지개 전화’는 서울 경기권 5만명의 시각장애인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단체. 400명의 자원봉사자가 등록돼 있고 장애인들이 은행이나 관공서 등에서 서류를 처리하거나 중요한 외출을 할 때 이를 돕는다.

오씨는 이 단체의 유일한 ‘상근 직원’이다. 사무실에서 장애인들의 전화를 받아 자원봉사자들과 연결시켜주는 일을 한다. 한달 월급은 50만원.

하지만 오씨는 이 ‘50만원짜리 간사’를 맡기 전까지만 해도 강남지역에서 ‘잘 나가던 여사장’이었다. 20대 후반이던 88년 레스토랑 사업에 뛰어들어 90년대에는 서울의 최고 번화가 압구정동에서 종업원 7명을 거느리고 술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월 매출이 4000만원이 넘었어요. 사업하는 재미에 결혼도 관심이 없었고 오직 성공하겠다는 ‘야심’뿐이었죠.”

오씨는 당시를 회고할 때마다 늘 멋쩍어 한다. 오씨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97년 2월의 교통사고. 당시 운전자 옆 좌석에 앉아 있었던 오씨는 운전자의 부주의로 큰 사고를 당했고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때 의사에게 ‘다리를 자르면 죽어버리겠다’고 했어요. ‘장애인’이 된다는 사실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오씨의 생각을 바꿔놓은 것은 병실 TV로 우연히 보게 된 한편의 다큐멘터리. “꿋꿋이 살아가는 장애인 주인공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절대 동정하지 말라’고 외칠 때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오씨의 다리는 ‘무사’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졌지만 오씨는 ‘여사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잃었던 다리를 찾았으니 보은(報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장애인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 거지요.” 이때 한 지인(知人)이 ‘무지개 전화’를 추천했다. 오씨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97년 6월 이곳의 간사를 맡았다. 그리고는 시각장애인들의 전화를 받아 자원봉사자들에게 연결해 주는 일뿐만 아니라 문제가 있어 보이는 장애인에 대한 상담역할도 한다. 대령 승진을 앞두고 시력을 잃어 자살을 기도했던 예비역 장교에게 자신의 기억을 들려주며 설득해 희망을 불어넣은 적도 있다.

이런 헌신적인 행동에 많은 장애인들이 오씨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씨의 생각은 의외로 담담하다.

“제가 하는 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눈이 둘이면 하나는 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요.”

〈이완배기자〉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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