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나희덕,세번째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펴내

  • 입력 1997년 10월 30일 07시 43분


코멘트
시란 무엇인가. 릴케는 「과육으로부터 느닷없이 해방된 과즙」이라고 노래했고 김수영은 「밤의 부엉이」라고 선언했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슴에 품고 있을 이미지, 그리고 다짐. 시인 나희덕(31)에 이르면 시는 「물은 담아도 간장은 담을 수 없는 금간 항아리」로 형상화된다. 「너무나 짜서 맑아진,/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그의 감식안//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시라는 항아리」(「어떤 항아리」중) 나희덕은 꼭 그 항아리 같다. 무엇이든 다 담아낼 듯 넉넉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아닌 것에 대해서는 끝내 아니라고 말하는 단단함. 겨우 서른을 넘긴 나이에 「…산다는 일은/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더 깊이 들어가는 것」(「속리산에서」중)이라고 말할 줄 아는 그가 세번째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를 펴냈다. 그는 말수 적은 시인이다. 감정의 분출을 좀체 허락하지 않는다. 새 시집에 겨우 일곱줄짜리 작가의 말을 쓰면서도 『내가 얻은 것은 침묵의 순연한 재가 아니었다. 끝내 절규도 침묵도 되지 못한 언어들을 여기 묶는다』고 부끄러워 한다. 그러나 그 낮고 잔잔한 목소리에서는 단단한 힘이 만져진다. 거친 세월을 헤쳐오며 박인 굳은살 때문일까. 전교조 교사에서 탈퇴교사 그리고 퇴직교사로, 우는 아이를 떼어놓고 직장으로 달음질쳐야 했던 일하는 엄마로서 적잖이 마음고생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간 날들에 대해 결코 「잔치는 끝났다」고 허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화상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던지지 못한 그 돌/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있네」라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과거를 오늘의 것으로 부여안는다. 『세상에 대해서도 또 제 자신에 대해서도 갑작스런 변화를 별로 믿지 않습니다. 때론 제 스스로도 답답하다고 느끼지만 내 속에서 충분히 익힌 것에만 정직성을 느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가 끊긴 단절의 시대는 시인을 외롭게 한다. 그 역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고 메아리 없는 노래를 부르는 안타까움을 고백한다. 그래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이 그에게 또 시를 쓰게 한다.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숨을 거둘 때는/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그곳이 멀지 않다」중)고 그는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은령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