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公企業)과 공기업(空企業) 사이[동아광장/김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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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대 누진제 등 국민 희생으로 한국 경제는 급성장할 수 있게 돼
최근 혹서기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 논란
공기업의 존재 이유 다시금 되묻게 해…‘국민 삶의 질’보다 ‘주주 우선’은 공허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습하고 뜨거운 여름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더운 날에는 새벽부터 친구들과 동네 뒷산에서 나무를 꺾어 움막을 짓고 시간을 보냈다. 숲의 그늘도 태양이 쏘는 직사광선에 속수무책인 한낮에는 시냇물에 몸을 담그다가 동네 형들이 모래사장에서 끓인 어죽을 얻어먹곤 했다. 간들바람이 후덥지근한 땅 바람을 밀어내며 하루의 끝을 알리면 바람이 머무는 평상에서 삶은 감자와 옥수수를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랬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고 선풍기가 부채를 대신했지만 나의 하루는 변함이 없었다. 폭염으로 달궈진 대기가 쉽게 식지 않는 대도시에서는 에어컨이 대중화됐다. 에어컨은 이제 정상적인 삶을 가능케 하고 어린이와 노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필수품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 세대는 에어컨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많이 쓸수록 비싸지는 주택용 전기요금 때문이다. 절약이 몸에 밴 그들에게 에어컨은 신줏단지 이상이다.

주택용이 산업용 및 상업용과 비교해 비싼 누진제를 적용받는 전기요금 체계는 석탄 한 줌이 아쉬웠을 산업화 시기에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정부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정부는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거치면서 산업용 전기를 더 확보하고 주택용 전기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차별적 누진제를 실시했다. 누진제는 전기 수요가 많은 여름과 겨울에 요금 폭탄의 원인이 됐고, 부모 세대에게 에어컨을 켜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공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에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양보와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는 수만 배 커졌고, 전기 공급 사업자인 한전도 최대 공기업의 하나가 됐다. 그 사이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로 인해 더위는 시골에서 부모와 이웃의 보호를 받는 시골 소년의 하루 놀잇거리가 아닌 사회적 약자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치명적 위협이 됐다. 더위 없는 쾌적한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국가가 나서서 보장해 줘야 하는 기본권의 문제로 변했다.

이번 혹서기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 논란을 보면서 2019년 한국 사회에서 한전을 포함한 공기업(公企業)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공기업은 국민경제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그 과정에서 국민 삶의 질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전기와 에너지처럼 국민 삶의 질과 직결되는 부문에서조차 적자를 따지고 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한전 경영진의 태도가 과연 공기업의 존재 이유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한전이 흑자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동안 약자를 보호한다는 감동적인 뉴스를 접한 적이 없다. 경남 밀양 주민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채 마을 한가운데 전신주를 박을 때만 공동체를 앞세우고 7, 8월 두 달간 월 1만 원을 할인해주는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 가결을 놓고 주주 이익을 염려하는 한전을 보면서 입맛이 쓰다. 공기업이 사기업처럼 이윤의 극대화와 효율성만을 추구한다면 국민 삶의 질은 안중에도 없는 공기업(空企業)이 아닐까? 한전의 인프라 구축을 위해 살던 동네를 떠나거나 불편과 위험을 감수했던 우리 부모 세대는 누굴 위해 그러한 희생을 한 것일까?

그래서 2000년에 완전히 민영화한 포스코의 행보가 눈길을 끈다. 포스코의 최정우 회장은 지난해 여름 취임식에서 ‘기업시민’을 경영이념으로 천명했는데, 이는 단순히 이윤을 창출하는 경제 단위가 아닌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는 기업의 실질적 역할을 강조한다. 기업이 ‘유사’ 시민이 되어 중소기업과의 상생, 사회적 투자, 자선 프로그램, 공공정책 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가령 포스코의 성과공유제는 하청 기업의 기술개발을 촉진하고 핵심 설비의 국산화를 앞당겨, 최근 일본과의 경제전쟁 국면에서도 안정적 운영을 가능케 한다. 공동체를 위한 적극적 노력이 기업 경영의 든든한 기반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민영화된 이후에도 과거 국민에게 진 빚을 잊지 않고 공공의 이익에 충실하려는 포스코의 노력에서 오히려 공기업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는 현실이 아쉽다.

내가 자란 고향에서는 이제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고 노인들은 마을회관 에어컨 밑에서 함께 음식을 해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공기업(公企業)이 공기업(空企業)이 되지 않으려면 시골에 아이들이 없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노인만 있는 현실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공기업#민영화#포스코#기업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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