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은 ‘제2의 고시촌’… 학점에 목맨 학생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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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고대-연대 로스쿨의 살벌한 경쟁

“방금 나간 학생이 맡긴 자료 복사해주세요.”

올해 4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 한 남학생이 대학원 건물 내에 있는 복사실 안으로 뛰어들어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여학생이 복사실에 자료를 맡긴 직후였다. 여학생은 지난 학기 상위권 성적을 받았다. 남학생은 복사실 주인한테 “같이 스터디를 하는 사이라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계속 문 밖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복사실 주인은 거절했다. 여학생이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자료를 보여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여학생이 맡긴 자료는 선배한테서 받은 중간고사 기출문제 풀이집이었다. 각 과목 교수 스타일에 따른 답안 작성법이 상세히 정리된 자료다.

로스쿨에서 벌어지는 학생들 간의 치열한 경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판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재판연구원(로클러크)과 검사, 대형 로펌 변호사가 되려면 학점을 잘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올해 국내 대형 로펌 5곳의 신입 변호사 중 78%를 차지한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로스쿨’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 ‘펜은 수건 위에’, ‘책장 넘길 땐 조용히’

“학점을 잘 받으려면 고급자료를 손에 넣어야 해요.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것보다 고급자료를 몇 번 훑어보는 게 훨씬 낫습니다.”

로스쿨 학생들은 사법시험을 거쳐 2년간의 사법연수원 생활까지 마친 법조인들이 공부한 분량을 3년 안에 익혀야 한다. 그렇다 보니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교과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고급자료를 구하는 데 열을 올린다는 것이다.

고려대 로스쿨 1학년인 A 씨(25)는 자신이 확보한 고급자료(중간고사 예상문제)를 학교 컴퓨터실에서 출력했다. 그런데 A 씨는 자신이 자리를 뜨자마자 다른 남학생이 방금 출력한 컴퓨터 앞에 앉는 걸 봤다. 이 남학생은 컴퓨터 ‘다운로드 목록’에 남아 있던 A 씨의 고급자료를 출력했다.

로스쿨 학생들은 성적과 관련된 것이라면 교수에게 항의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올해 3월 연세대 로스쿨. 강의를 하던 한 교수는 “앞으로는 발표점수를 평가 항목에서 제외하겠다”고 학생들에게 알려야만 했다. 교수는 강의 첫날 “발표를 열심히 하라”며 발표자에게는 가산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일부 학생이 “수강신청 변경을 통해 두 번째 강의부터 들은 사람들은 발표 횟수에 손해를 볼 수 있다”며 교수에게 항의 메일을 보낸 것이다.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학생들 간의 신경전도 경쟁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수건 갖고 다니면서 그 위에 펜을 내려놓으세요.’ 서울대 로스쿨 3학년 B 씨(28)는 올해 4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책상에 이런 내용의 쪽지가 붙어 있는 걸 봤다. 화장실 가기 전 볼펜을 책상에 내려놓을 때 났던 소리가 귀에 거슬렸던 누군가가 붙여놓은 것이다. 도서관에는 ‘다리 떨지 말라’ ‘책장 조용히 넘겨라’는 등의 쪽지가 하루에도 여러 자리에 붙는다고 한다. B 씨는 “다들 예민한 상태”라고 했다.

○ ‘학점이 곧 나 자신’

이 같은 로스쿨 학생들의 경쟁 분위기는 ‘학점’ 때문이다. 로스쿨 학생들은 선호하는 직장인 법원이나 검찰, 대형 로펌에 입성하려면 학점과 학교 간판 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SKY 로스쿨’ 학생들로서는 경쟁자를 따돌릴 수 있는 건 학점이다. 게다가 대형 로펌들은 1학년 때 성적을 바탕으로 인턴 직원을 뽑고 이들 중 일부에게는 변호사시험 합격 후 채용을 약속하기도 한다. 로스쿨 학생들이 1학년 때부터 ‘학점’에 ‘올인(다걸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 5월 연세대 로스쿨 1학년 C 씨는 중간고사 성적을 확인한 뒤 곧바로 동네병원으로 가 허리디스크 진단서를 발급받았다. 휴학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학 때는 거의 A+ 학점만 받았던 C 씨였지만 중간고사 성적이 학급 중간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 C 씨는 “그 성적으로 1학기를 마칠 때까지 계속 다니면 대형 로펌 인턴이나 검사, 재판연구관 자리는 도전조차 힘들 것 같았다”고 말했다. C 씨는 휴학 후 서울 강남의 한 학원에서 로스쿨 1학년 수업과정을 ‘선행학습’했다. 올해 복학한 C 씨는 다시 1학년 1학기 과정부터 수업을 들었다.

서울대 로스쿨 졸업생(28)은 “로스쿨에서는 ‘나’라는 사람은 성적으로 규정돼 성적이 낮은 사람하고는 말도 잘 섞지 않는 분위기였다”며 “소외감을 느껴 로스쿨 도서관이 아닌 중앙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했다”고 말했다.

○ 절대평가? 그래도 경쟁할 수밖에…

성적 경쟁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학생들도 많다.

“학부 때 스트레스라는 걸 모르고 살았고 단과대에서 꽤 높은 등수로 졸업했다. 그런데 로스쿨 와서 탈모에 비염, 허리디스크, 안구건조증 등등 만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생전 받아본 적 없는 성적과 등수는 덤이다.” 올해 4월 서울대 로스쿨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이 글 아래에는 “학부 생활 내내 성적 스트레스가 뭔지 전혀 몰랐는데 로스쿨 생활 내내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글도 보였다.

연세대 로스쿨 2학년 D 씨(29)는 지난해 11월 기말고사를 앞두고 심한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담석증 진단을 받았다.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의사는 빨리 수술을 받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D 씨는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3주 동안 진통제를 먹고 버텼다.

매년 낮아지는 변호사시험 합격률도 학생들의 불안감을 키운다. 제1회 변호사시험이 치러졌던 2012년만 해도 전체 응시자의 90% 가까이가 합격했는데 이후 합격률이 해마다 떨어져 2018년 제7회 시험 땐 합격률이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올해 제8회 시험에서 합격률이 조금 올라 다시 50%대로 올라왔다.

인권 변호사에 관심이 많던 E 씨(25)는 올해 연세대 로스쿨에 입학했지만 인권법 과목을 수강 신청하지 않았다. 형법과 민법 등 기본 과목을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권법은 변호사시험 과목이 아니다. E 씨는 “입학 후 어느 순간부터 대형 로펌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서울대 로스쿨은 지나친 학점 경쟁을 막기 위해 올해부터 1학년은 절대평가를 하겠다고 밝혔다. ‘S(satisfactory·통과)’ 또는 ‘U(unsatisfactory·낙제)’로만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학교 로스쿨의 한 1학년 학생(23)은 18일에도 오전 2시까지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이 학생은 “1학년 때 성적을 절대평가로 매기겠다는 얘기는 다른 말로 하면 2학년 1학기 성적으로 인생이 결정된다는 얘기”라며 “어쨌든 경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상준 speakup@donga.com·고도예 기자
#로스쿨#변호사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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