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 日외상, 남관표 대사 불러 발언 중간 끊고 “한국 지극히 무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9일 16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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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이 도쿄 외무성 접견실에서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일본 정부가 제안한 
징용 배상 관련 제 3국 중재위원회 개최를 한국 정부가 거부한 데 항의했다. 이날 고노 외상은 남 대사의 모두 발언 중 그의 
발언을 도중에 끊는 외교 결례를 범해 논란을 낳았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19일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이 도쿄 외무성 접견실에서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일본 정부가 제안한 징용 배상 관련 제 3국 중재위원회 개최를 한국 정부가 거부한 데 항의했다. 이날 고노 외상은 남 대사의 모두 발언 중 그의 발언을 도중에 끊는 외교 결례를 범해 논란을 낳았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잠깐 기다려 주세요(ちょっと待って下さい·조토맛테구다사이).”

19일 오전 10시 20분경 일본 도쿄 외무성 4층 접견실. 모두 발언을 하는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의 말이 일본어로 통역되는 중에 갑자기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이 남 대사의 말을 끊었다. 고노 외상은 결례를 아랑곳않고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다. 애초 고노 외상과 남 대사가 한 차례씩 모두 발언을 하기로 했던 사실을 잊은 듯 했다.

●남 대사 말 끊은 고노 외상

이날 외무성은 일본이 제안한 중재위원회 개최 기한(18일)까지 한국 정부가 응하지 않자 남 대사를 초치했다. 일본이 징용 문제로 한국대사를 초치한 것은 이번이 다섯번째다. 지난해 10월 30일과 11월 29일 한국 법원이 각각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배상 확정판결을 내렸을 때도 대사를 초치했다.

이날 10시 15분경 시작된 모두 발언은 양국 취재진들에게 공개됐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남 대사가 고노 외상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고 고노 외상도 “이른 아침에 와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남 대사가 강제징용 해법을 언급할 때였다. 남 대사는 “일본 측에 한국 구상을 제시했고 이를 토대로 더 나은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함께 지혜를 모으자”고 했다. 고노 외상은 갑자기 말을 끊으며 “모르는 척하고 (다시) 제안하는 것은 지극히 무례하다”며 항의했다.

고노 외상의 언성이 높아지자 외무성 실무진들이 진행 요원을 향해 손가락으로 ‘X’자를 표시했다. 취재진을 방에서 내보내라는 뜻이다. 진행 요원들은 고노 외상이 말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나가주세요”라며 취재진을 밀기 시작했다. 고노 외상의 발언과 진행 요원의 말이 겹치며 접견실 분위기는 순간 소란스러워졌다. 급기야 고노 외상이 “이 이상은 취재진들이 나간 후 진행하겠습니다”라고 했고 취재진들은 모두 자리를 떴다. 결국 남 대사는 재반박 기회를 놓쳤고 모두 발언조차 마치지 못했다.

둘은 10시 30분부터 약 10분간 비공개 회담을 진행했다. 남 대사가 외무성을 떠난 후 고노 외상은 10시 50분경 1층에서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무례하다’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한국 제안은 이미 문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 측이 이를 공식석상에서 또 이야기하는 것은 일본 측에서 볼 때 이상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남 대사에 결례한 것에 대한 철회 및 사과는 전혀 없었다.

고노 외상의 결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30일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에 대한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직후 이수훈 전 주일 한국대사가 외무성으로 초치됐다. 당시 고노 외상은 이 전 대사와 악수도 하지 않은 채 모두 발언을 시작했다. 발언을 끝내자마자 취재진들에게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 이 전 대사 역시 모두 발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일본의 억지 주장

겉으로 드러난 결례 이상으로 고노 외상의 ‘적반하장’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남 대사에게 “강제징용 문제를 다른 문제와 연계 시키지 말길 바란다. 그렇게 하면 한국 여론에 이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 대사 초치 후 기자들에게 ‘다른 문제’는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 조치를 언급한 것임을 시인했다. 정작 수출 규제 강화와 징용문제를 먼저 연계한 것은 일본 측이기 때문이다.

경제산업성은 1일 반도체 소재 등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를 발표하며 그 배경으로 △한국과의 신뢰 관계 손상 △수출 관리에 대한 부적절한 사안 발생 △징용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법 미제시 등 3가지를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2일 “징용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조치 배경을 설명했다.

기자들이 이 같은 점을 들며 문제를 제기하자 고노 외상은 “일본의 수출 관리는 (한일 당국 간) 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관계가 없다”고 앵무새처럼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경제산업성이 수출 규제 강화 배경으로 징용 문제를 언급한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경제산업성에 물어보라”며 회피했다.

●경제산업성 관계자 “문 정권 계속되는 한 규제 지속”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보복 조치를 관장하는 일본 경제산업성 관계자가 “문재인 정부가 계속되는 한 규제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발언했다고 아사히신문이 19일 보도했다. 이에 따라 한일 갈등이 생각보다 훨씬 장기화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아사히에 따르면 한 경제산업성 간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보다 강제징용 피해자(징용공) 문제에 대한 한국 측 대응이 수십 배 지독한 행위다. 문재인 정권이 계속되는 이상 (규제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 간부의 발언은 사실상 이번 수출 규제 강화 조치가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임을 시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사히는 “한국산 반도체는 다국적 기업의 스마트폰 및 TV 제조 등에 사용되기 때문에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부품 공급망을 통해 세계적 생산 시스템에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한 비판이 일본으로 쏠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요미우리신문도 “국제법 위반이 또 쌓였다”는 외무성 간부 발언을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작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국제법 위반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번에 중재위 개최에 응하지 않은 것 역시 국제법 위반으로 보고 있다. 요미우리는 “일본 측은 국제법에서 인정된 대항조치를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 기업에 실제 피해가 일어나면 대항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혀왔는데, 각종 명분을 쌓으면서 더 일찍 대항조치를 꺼낼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외무성은 12일 일본 내 미국 및 유럽 언론인을 대상으로 영어로 한일 관계에 대한 설명회를 개최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외무성이 징용 건에 대해 국제법 문제이지 역사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에 영향력이 큰 미국과 유럽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들어 문 정권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이코노미스트 “일본 규제는 근시안적 결정, 자해 행위” 강력 비판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근시안적 결정이자 무모한 자해행위’라고 강력 비판했다. 한국이 화학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물질을 반출했다는 일본측 주장도 ‘설득력 없다(a far-fetched claim)’고 일축했다.

이코노미스트는 19일(현지 시간) 공개한 최신호(20일자) 기사에서 수출 규제에 따른 한일 갈등을 소개하며 “일본의 수출 제한 결정은 ‘경제적으로 근시안적(economically shortsighted)’”이라며 2011년 중국의 희토류 수출 제한 조치 사례를 언급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희토류 수출 중단에 맞서 자체 투자를 확대해 중국산 희토류에 대한 의존도를 낮췄다.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은 한국 기업들이 승인을 받고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은 이미 국내 화학제품 생산 촉진을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더 넓은 지정학적 맥락에서 이번 일본의 ‘자해(self-harm)’는 더욱 무모하다”고 비판했다. 일본이 주요 반도체 부품을 틀어쥐고 한국에 수출을 하지 않으면 그 고통이 전 세계 기술 공급망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미국에 다른 대통령이 있었다면 양국 관계 개선에 나섰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취임 직후 맨 처음 한 일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파기였다. 외교에 대한 미국의 줄어드는 관심은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결국 양국 관계개선은 두 나라에 달렸다. 영국과 프랑스간 교역 규모보다 더 큰 연 800억 달러의 교역을 벌여온 양국 모두 뒤로 물러설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는 피해가 제한적인 만큼 상황을 완화하기에 늦은 것이 아니다”라고 화해를 주문했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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