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사태 이후가 더 두렵다”[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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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분업구조 깨지면 모두 손해… 靑 “철저히 국익적 접근” 꼭 견지해야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2012년 중일 간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은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경제규모 세계 2위에 올라선 지 2년 만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일본의 센카쿠 국유화 조치에 중국이 물리적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맞섰다. 중국 외교부는 센카쿠 열도 문제를 ‘핵심 이익’으로 규정했다. 중국에서 핵심 이익은 대만, 티베트 문제에서 쓰는 말이다. 센카쿠는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중국과 기존 질서를 확인하려는 일본의 시험대였다.

그해 가을 베이징 거리에 분출된 젊은이들의 분노가 지금도 생생하다. 펀칭(憤靑·분노한 청년)들은 기차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남부 저장성에서까지 올라왔다. 톈안먼 사태의 비극을 기억하는 중국 집권세력은 도심 시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당시 베이징 곳곳의 도로는 ‘댜오위다오를 돌려 달라’는 청년들의 구호로 뒤덮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집회 소식이 올라왔고 공안들이 시위대를 호위했다. 일본 가게와 일제 차량에 대한 백주테러까지 있었지만 공권력이 이를 방조했다. 중국의 일본 기업들이 동남아로 이전한 결정적 계기였다.

하지만 시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은 사실상의 관제데모를 조직했으면서도 겨울이 다가오자 국민감정을 철저히 통제했다. 격앙된 청년들이 창끝이 자칫 국내 문제로 향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일 관계를 적정한 선에서 관리하려는 당국의 의도였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확전을 억제함으로써 일본의 퇴로를 열어줘 상황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제어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중일은 외교 무대에서 센카쿠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긴 했지만 당초 우려했던 극단적인 충돌은 없었다. 그 대신 양국은 2014년 ‘관계개선 4대 원칙’ 합의, 지난해 아베 신조 총리의 중국 방문 등을 통해 신우호시대 개막이라는 극적 반전을 이뤄냈다. 미국의 대중 압박이 양국 관계 정상화의 촉매 역할을 한 측면이 있지만 영토 분쟁 이후의 상황을 두 나라가 세심하게 관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만난 기업인 K는 일본의 경제보복보다 두려운 게 경제보복 이후 한일 간 새 국가 질서라고 했다. 반일의 정치학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큰 장을 차지해왔다. 그럼에도 양국은 1965년 수교 이후 적어도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꾸준히 협력을 이어왔다. 대일 경상수지가 매년 적자를 낸다고 하지만 이는 한국이 그만큼 일본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국은 이런 국제분업 구조를 토대로 성장해왔다.

한일 관계는 경제보복 사태 이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과거사가 응축시켜 놓은 국민감정이 관계 개선을 쉽게 용인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본도 이번에는 칼을 제대로 갈고 나왔다. 메이지유신 이후 1870년대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됐을 때 그 욕구를 20년 넘게 억제하며 치밀하게 조선 침탈을 준비했던 나라다. K가 두려워하는 게 이런 상황이다. 상호 신뢰에 기초한 교역관계의 호혜가 쉽게 복구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대응이 아니라 수습이 필요한 때다. 겉으로는 강대강 전술을 취하더라도 누군가는 중재를 하고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청와대는 감정적 대응보다 철저히 국익적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제발 그랬으면 한다. 대화의 통로를 다시 열고, 정부가 안 된다면 재계와 민간을 통해서라도 돌파구를 마련하는 게 맞다. 정치적 갈등 때문에 민간기업이 일본에 건너가 제품 원료를 구하러 다니는 상황을 원했던 건 아니지 않은가.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한일 관계#일본 경제보복#한국 수출 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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