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누렇게 변한 北 희귀자료들 디지털화 앞장서는 소냐 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3일 11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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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도서관의 한국계 사서 소냐 리 씨. 이정은 기자 lightlee@donga.com
미국 의회도서관의 한국계 사서 소냐 리 씨. 이정은 기자 lightlee@donga.com
누렇게 변한 종이 위에 잉크가 바래져 희미해져 가는 사진 밑에 ‘국가검열상 김원봉’이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김일성-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1948년 발간된 북한 서적의 맨 앞에 붙어있는 사진 자료였다.

2일(현지 시간) 미 의회도서관의 아시아 자료실. 이 곳의 유일한 한국계 사서인 소냐 리 씨(60)는 책을 열어서 사진을 보여주며 “북한 서적을 정리하다가 이번에 새로 찾아낸 자료”라고 했다.

“제일 앞 장에 김일성, 그 다음 장에 3명의 부수상에 이어 세 번째 페이지에 나오는 걸 보면 북한에서의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죠. 북한 자료들이 의회도서관에 들어온 지 수십 년이 됐지만 아직도 이렇게 새로 찾고 연구할 게 많아요. 이런 자료들은 디지털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색이 바래지고 낡아서 앞으로 장기 보존이 어렵습니다.”

의회도서관은 소장 중인 북한 잡지와 문헌 자료를 스캔해서 저장하는 디지털화 작업을 10월부터 본격화한다. 제목과 출판사, 저자 등의 색인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전산화하는 프로젝트도 내년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미 의회도서관 아시아 자료실 내 유일한 한국인 사서인 소냐 리는 이런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추진해온 공신이다.

리 사서는 “세계 최대 도서관 중 하나인 미국 의회도서관에는 전 세계에서 1권밖에 남아있지 않은 북한의 유일본 자료들이 많다”며 “6.25전쟁 당시 미군과 유엔군이 가지고 나온 북한 자료들 중에는 소장 60년이 넘어가면서 낡고 바스러지기 직전의 상태에 놓인 것들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10년 전부터 디지털화를 추진했으나 인력과 자금, 의회도서관의 내부 절차 등 문제로 큰 진척을 보지 못했다.

의회도서관은 1차적으로 1948년부터 1969년까지의 북한 잡지 21종에 담긴 기사와 칼럼 등 4만4246개의 디지털 색인작업을 진행해 지난해 웹사이트에 업로드했다. 이어 나머지 자료들에 대한 본격적인 스캔 작업과 추가 색인작업을 앞으로 진행하게 된다. 아직 작업하지 못한 북한 잡지 종류만 200개가 넘는다는 게 리 사서의 설명이다. 의회도서관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1일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의 협력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KF는 현지에 한국인 주니어 사서를 파견키로 하고 현재 공모 중이다.

리 사서가 보여준 북한 자료들 중에는 ‘북조선노동당 강령’부터 과학, 여성, 농업 등 분야별 잡지는 물론 맥아더 장군을 패잔병으로 묘사한 ‘패전장군의 말로’ 같은 그림 동화책도 있었다.

리 사서는 “북-미 협상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관계가 개선되면서 정부기관 관계자를 비롯해 북한 자료를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며 “미국 뿐 아니라 독일 영국 일본 등지에서 교수와 학생들도 많이 온다”고 귀띔했다.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하는 북한 사람들은 막상 이 자료에 접근하지 못한다. 1990년대 후반 북한 인민학습당 소속의 간부들이 딱 한 차례 방문한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리 사서는 1995년부터 24년 간 의회도서관에서 근무해온 아시아 자료실의 산 증인. 그는 “북한 자료가 쌓여 있는데도 제대로 분류, 정리돼 있지 않다 보니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책’들이 적지 않다”며 “이런 자료의 색인 및 디지털 작업은 접근성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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