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박성민]난임 정책, 디테일이 핵심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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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차라리 그 돈으로 공공 정자은행이나 난자은행을 만들어 주세요.”

지난달 31일 서울 관악구 더불어민주당 서윤기 시의원 사무실. 10평 남짓한 좁은 회의실로 난임 가족 40여 명이 찾아오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서울시가 39억 원을 들여 서울의료원에 만들기로 한 ‘공공난임센터’ 계획을 시의회에서 막아달라고 요구한 자리였다.

한 번에 수백만 원씩 드는 난임 시술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시에서 만들겠다는데 당사자들이 왜 반대하는 걸까. 이유는 단순하다. 민간 의료기관의 베테랑 난임 전문의를 두고 누가 검증되지 않은 공공난임센터에서 시술을 받겠느냐는 것이다. 실효성이 떨어지는 전시성 행정에 아까운 예산을 낭비하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스스로를 ‘난임 노마드(유목민)’라고 불렀다. 시술 확률이 높은 병원을 유목민처럼 찾아다닌다는 의미에서다. 시술을 거듭할수록 분만 확률은 낮아지지만 희망의 크기까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난임의 고통은 저의 부모도 알지 못합니다. 부모님은 이미 저를 낳아봤기 때문이죠. 그래도 저는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39억 원이면 2000명의 난임 시술비를 지원할 수 있어요. 그중 10%만 분만에 성공해도 서울에 신생아가 200명 태어나는 겁니다.” 2시간여 동안 진행된 간담회에서 난임 여성들은 간절한 목소리로 실효성 있는 난임 정책을 요구했다.

환영받을 줄 알았던 정책이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서울시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서울시 관계자도 참석해 난임 여성들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결국 서울시는 지난주 공공난임센터 설립 계획을 철회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공공난임센터 설립을 둘러싼 이번 논란은 정책의 성공 여부가 디테일에 달려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책 입안자의 ‘선의’가 담겼고, 방향이 옳더라도 시민들이 체감하지 못한다면 그 정책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서울시가 난임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일방통행식 정책 추진을 멈춘 것은 평가할 만하다.

난임 지원 정책은 지속적으로 확대돼왔다. 하지만 아직도 사각지대가 많다. 건강보험 난임 지원 횟수를 기존 10회에서 17회까지 늘리기로 했지만 체외수정 12회(신선배아 7회, 동결배아 5회), 인공수정 5회로 시술별 횟수가 정해져 있다. 이 횟수를 넘긴 난임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수백만 원을 들여 비급여 진료를 받기도 한다. 난임 시술을 받기 위해 휴가를 갈 수 있는 직장 여성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앙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정책 집행에 있어 서로의 사각지대를 메워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중앙정부가 난임 지원 횟수를 늘렸다면 지자체는 경제적 부담이 큰 비급여 진료를 지원하는 데 집중하는 식이다. 이렇게 디테일을 꼼꼼하게 챙겨 난임 소외계층이 사라질 때 저출산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min@donga.com
#난임 정책#공공난임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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