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결혼은 모험”…DJ의 정치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11일 00시 09분


코멘트
“이윽고 날이 밝아왔다. 미행이 경호로 바뀌었다. 기나긴 생활동안 지속되던 미행이 떨어져나갔다는 감회는 깊었고 경호는 낯설었다.”(1997년 12월 19일)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부인 수송당(壽松堂) 이희호 여사가 2008년 발간한 자서전 ‘동행’에서 4번째 대선 도전 끝에 당선된 DJ와 함께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남긴 일성이다. 그의 표현대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재수생’이었던 DJ와 평생을 동행했던 이 여사는 DJ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동지였다.

● DJ의 정치 동반자

이 여사는 1962년 5월 40세의 나이로 김 전 대통령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DJ는 서른여덟살이었다. 이 여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반대했다. 이 여사는 자서전에 “그 사람, 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 뿐만 아니라 셋방에 앓아누운 여동생도 있었다”며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곧 거세게 노크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인동초’ 아내로서의 삶은 처음부터 고난이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납치사건 및 사형선고, 6년에 걸친 옥바라지, 망명생활 등 정치적 혹한기를 함께 견뎠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선고 선고를 받았을 때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구명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국제사회를 향해 구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여사는 자서전에서 “내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1980년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라고 회고했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광주가 남편의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한다. 신군부는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 남편까지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DJ는 이런 이 여사를 향해 생전에 늘 “영원한 동반자이자 동지”라며 애틋함을 감추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한 강연에서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 한국 여성인권운동의 선구자

이 여사는 대통령 부인이기 전에 한국 여성인권운동의 선구자였다. 시작은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1950년. 28살의 나이로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피난길에 올랐던 다른 여성 지도자들과 1952년 11월 부산에서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상임간사로서 발기문 작성 등 실무를 도맡아 했다.

감리교 선교사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고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58년 36세의 나이로 귀국했을 때도 사회운동가의 길을 택했다. 이 여사는 1959년 1월부터 대한여자기독교청년 연합회(YWCA) 총무로 일하며 본격적인 여성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많은 여성들이 혼인신고도 없이 살다가 쫓겨나는 일이 흔했던 시절이었다.

이 여사는 대통령 부인 시절 전형적인 참여형 퍼스트레이디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퍼스트레이디로서 대통령 남편없이 따로 해외 순방을 간 것도 이 여사가 처음이었다. 2002년에는 퍼스트레이디 최초로 유엔 아동특별총회에서 기조연설도 했다. 대통령과 북한을 동행 방문한 것도 최초 기록이다. 남녀차별금지법 제정, 한국여성재단 발족(1999년), 결식아동 지원을 위한 사랑의 친구들 창립(1998년) 등은 퍼스트레이디가 직접 이슈를 제기하고 실행에 옮겼던 정치적 족적들이다.

● 다시 영원한 DJ의 동지로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퇴임 후에도 늘 공식석상에 남편과 함께 했다. 그런 이 여사를 향해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각별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2009년 1월 쓴 일기에서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고 썼다. 이 여사도 같은 마음이었다.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시 47년 평생의 연인(戀人)이자 동지였던 김 전 대통령의 입관식 때 편지를 썼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이 여사는 DJ 서거 이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2015년 8월 90세가 넘는 고령에도 방북할 정도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2011년 12월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조문단에도 합류했다. 당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은 조문을 온 이 여사가 오른손으로 악수를 청하자 두 손으로 이 여사의 오른손을 감싸 쥐며 환대했다. 이 여사가 김정은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자 김정은이 곧바로 고개를 숙여 귀엣말을 하듯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한 참석자는 “꼿꼿이 선 채 한 손으로 조문객과 악수하거나 아예 조문객의 인사만 받던 김정은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김정은 주변에 있던 군 장성들은 이 여사에게 거수경례를 했다”고 전했다.

이 여사는 이제 다시 DJ 곁으로 떠났다. 이 여사의 자서전은 이렇게 끝난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을 용서하며 아껴준 것 참 고맙습니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