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작가 박서보 “나는 시대의 산물이자 화살받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6일 22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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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전시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박서보 전시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뿔 난 도깨비’

원로작가 박서보(88)는 1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대규모 회고전 간담회에서 세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단색화의 대표 작가이자 교육자, 행정가로 활발히 활동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홍익대 사단을 거느린 패권주의자’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런 그의 작품 129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23일 서울 서대문구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회고전을 열게 된 소감을 묻자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과거 작품이 전통의 양식적 해석이 많아 부끄러웠는데, 이번에 적나라하게 내놓고 보니 그것 역시 시대의 산물로 누구의 영향도 없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전시장에서 입체 작품인 ‘허상’을 볼 수 있다. 미국 조지 시갈의 인체 조각과 일본 다카마쓰 지로의 그림자 회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건축가 김수근이 재밌겠다고 해 오사카 만국박람회에도 출품했다.”



박서보 회화 No.1 1957
박서보 회화 No.1 1957
● “‘No.1’ 그릴 당시 폴록 몰라…서양 미술 수용한 바 없어”

박서보는 1956년 ‘반(反)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선언으로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고 1년 뒤 ‘회화 No.1’를 발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작품이 박서보를 ‘국내 최초 앵포르멜 작가로 알렸다’고 한다. ‘앵포르멜’은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생겨난 추상 미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설명대로라면 박서보는 ‘최초로 앵포르멜을 모방한 작가’가 된다. 만약 ‘앵포르멜(프랑스어로 ’형태가 없는‘)’이 문자 그대로 추상의 의미라면, 이미 1930년대 유영국 등이 추상 미술을 선보인 바 있어서 최초로 보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 그는 앵포르멜을 모방한 것이 아니며 고유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회화 No.1’은 잭슨 폴록의 작품과 형태가 비슷하고 제목도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예술가들은 일본의 월간지 ‘미술수첩’을 통해 서양 미술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잭슨 폴록은 미군도 즐겨 보던 ‘라이프’지에 대대적으로 소개된 유명 작가였다. 그러나 박 화백은 당시 폴록을 몰랐다고 말했다.

― ‘회화 No.1’이 오랜만에 전시됐다.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그런 실험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당시 전쟁으로 폭격을 맞은 종로 거리 부서진 시멘트 조각이 붙은 철근 아래를 걸어가며 나도 모르게 그런 작품이 나왔다. 그림을 그릴 때 잭슨 폴록은 몰랐다.”

― 그렇다면 구체적 형상을 표현한 작품인가?

“형상에서 추상이 된 거다. 이 그림도 처음에는 페인트의 두께감이 생기지 않아 안료 가루를 기름에 섞어 소주병으로 밀어 물감을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 현대미술이 출발했다. 그 때 함께한 김창열, 윤명로, 김종학 등이 ‘안국동파’라고 놀림을 받았다.”

― 잭슨 폴록을 몰랐나?

“그림을 잘 보면 밑색이 보인다. 자주 다시 그려 ‘땜빵’한 흔적도 있다. (제목은 왜 ‘No.1’이라고 붙인 것인가?) 시리즈의 첫 그림이기에 그렇게 붙였다. 지적은 자유지만 당시에는 정보가 아무것도 안 들어왔다. 무역도 없던 시절이다. 나는 보수 정권에서는 혁신주의자, 좌파 정권에선 우파 퇴물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좌도 우도 아닌 개혁파다.

나는 역경을 겪으며 ‘현대 미술 가치관 집약 운동’을 했고 그것이 우리나라 미술을 만들었다. 평론가들이 서양 글만 짜깁기하고 자기 얘기가 없다. 그래서 내가 자연과 인간을 서양인처럼 이원화하지 않고 나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는 동양적 가치관을 현대적으로 정립시켰다. 내 생각을 비워야 자연과 ‘합일’이 되고 ‘수신’을 한다는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번 전시 설명에는 1960년대 ‘팝 아트’와 ‘옵 아트’를 수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그런 것을 수용한 일이 없다. 옵 아트는 착시 현상을 일으켜야 하는데 내 작품은 단순한 색띠 구성이다. 서양의 이론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이 우리의 문제다. 그만큼 자기의 이론도 눈도 없다.”



박서보 묘법 No.190411 2019.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박서보 묘법 No.190411 2019.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내 ‘묘법’ 트웜블리(톰블리)보다 낫고 연대도 확실”

1970년대 그의 작품은 연필로 선긋기를 반복한 ‘묘법’으로 변화한다. 그는 둘째 아들이 공책에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이 때부터 색채와 형태가 단순해진 작품들은 ‘단색화’로도 분류된다. 한편 이들 작품은 낙서를 모티브로 ‘유희성’ 등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 미국 작가 사이 트웜블리(사이 톰블리·1928~2011)와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박 화백은 자신의 작품이 ‘정신성’을 지녔기에 차별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967년 ‘묘법’ 최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류병학이라는 엉터리 평론가가 연도를 속였다고 주장한다”며 “초기 실험작을 누가 발표하나. 그런데 아직도 무식한 소리를 사람들이 퍼나른다”고 했다.

― ‘묘법’은 사이 트웜블리와 비슷하단 지적이 있다.

“세잔과 르누아르의 정물을 두고 똑같은 유화인데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연필을 썼다고 비슷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트웜블리는 즉흥적 낙서를 표현한 것이고 나는 행위의 반복, 자연과의 합일을 표현했다. 정신이 다르다.”

― 트웜블리의 작품을 정신성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작품은 순식간에 완성이 된다. 물론 재주는 있는 친구다. 그 친구 작품이 한 점에 1000만 달러가 넘는데 나는 옥션에서 200만 달러가 겨우 넘었다. 2인전으로 겨뤄보고 싶다. 내 신작은 수신에 ‘치유’ 개념, 색채까지 넣어 최대의 경지로 트웜블리는 게임이 안 된다.”

― ‘수신’이 그림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왜 그런가. 문맹 같은 사람이 고정관념을 가지면 뭘 쥐어줘도 모른다. 이번 작품만 해도 남들이 먼저 ‘완전히 수신과 치유를 동시에 잡는다’고 이야기 한다. 외국 갤러리와 평론가가 모두 내 그림이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나 개념적으로 접근해 ‘선만 긋고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 국내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왜 한국적 미학인가?

“보고도 모르는 사람은 문맹이다. 자기들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하나. 또 내가 건강이 나빠지며 조수를 쓰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수신’은 바닥에 깔고 ‘치유’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데 왜 수신이라고 해놓고 조수를 쓰느냐고 공격한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한국 사람은 개인적으로 우수한데 한 사람이 올라가면 밑에서 끌어 내린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 작가의 설명보다 작품이 직접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작품을 봤을 때 느껴야지. 내 신작은 모두가 전에 없던 밀도감이 있다며 높이 평가한다.”


● “나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자 화살 받이”


단색화 논란에 대해서도 “외국 컬렉터와 평론가는 좋아하는데 국내에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는 말했다. 또 단색화는 다색의 반대 개념으로 한 색을 사용한 ‘모노크롬(단색)’의 이미가 아니라 수행의 개념이며 서양의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민중미술에 대해 평가할 때는 ‘팝 아트’ 등 서양의 사조를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 주변에서 존경과 호평을 많이 받는다.

“단색화는 지금 없어서 못 파는 것이지 지속적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 또 단색화 다음에 민중미술이 뜰 거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민중미술의 출발은 훌륭했지만 양식은 19세기 고전주의 스타일이다. 가난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림은 없는 사람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 팝 아트는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이 다른데, 민중미술 작품은 전부 비슷하다.”

― 한국적 상황을 담았다는 측면에서 민중미술도 가치를 지닐 수 있지 않나?

“글쎄. 남한테 관심이 없어서. 다만 그동안 나온 걸 보면 양식이 다 사실주의다.”

― 단색화가 급조된 이론이라는 비판에 대한 생각은?

“절대 그렇지 않다. 미니멀리즘을 한국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나를 전부 비워내는 것이다. 서양은 개념으로 우리는 사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인데 구별을 못한다.”

― 예술 작품의 독창성은 어떻게 생긴다고 보나?

“큰 흐름에서 자신만 가능한 길을 찾아야 한다. 평론가 이일이 나를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작가’라 했는데, 우리 사회가 발전해 이제 나 같은 사람은 필요 없다. 나폴레옹이 그 시대에 안나왔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 앞장서야했던) 시대의 산물이고, 화살받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평가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나처럼 시대가 명확하게 작품이 바뀐 작가가 없다. 피를 토하듯 새로운 길을 찾아왔다.”

김민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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