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새 로비 심장부… “윌러드는 가라, 트럼프 호텔이 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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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매일 밤 정장차림 로비스트 북새통, 사우디 큰손은 객실 500개 예약도
시민단체는 ‘대통령 뇌물’ 논란 제기

미국 워싱턴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의 로비 전경. ‘벤저민 바&라운지’라는 이름의 로비 와인바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및 의회 인사들을 만나려는 로비스트와 외교관, 외국 정부 관계자들로 밤마다 북적인다. 사진 출처 트럼프인터내셔널호텔 웹사이트
미국 워싱턴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의 로비 전경. ‘벤저민 바&라운지’라는 이름의 로비 와인바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및 의회 인사들을 만나려는 로비스트와 외교관, 외국 정부 관계자들로 밤마다 북적인다. 사진 출처 트럼프인터내셔널호텔 웹사이트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대리석 바닥 위로 화려한 샹들리에 6개가 번쩍이는 건물 로비. 이달 초 오후 9시가 다 돼가는 시간대에 찾은 미국 워싱턴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에는 짙은 색 슈트 차림의 남성들이 가득했다. 벽 한쪽에 자리 잡은 기다란 칵테일 바가 멀리서 보면 검은 띠를 두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모두가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정장 차림의 여성들은 대형 모피 숄이나 럭셔리한 스카프로 한껏 멋을 냈다.

칵테일 바 외에도 대형 홀처럼 탁 트인 로비 전체를 수십 개의 테이블과 고급 소파로 채워 놓은 트럼프 호텔의 밤은 그야말로 북적이는 사교의 장이었다. 저녁이면 가벼운 셔츠 차림의 사람들이나 관광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워싱턴의 다른 호텔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와인 주문을 받던 이 호텔 직원은 “주변에 정부청사들이 있어서 그런지 정부 관계자가 많이 온다”며 “로비스트나 외교관, 변호사들이 몰려드는 곳”이라고 귀띔했다.


○ 로비스트의 고향 윌러드 호텔

워싱턴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 위치한 트럼프 호텔은 요즘 로비스트들의 새로운 집합소가 되고 있다. 저녁이 되면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주요 로펌 변호사들은 물론이고 외국에서 출장 온 기업인과 로비스트들이 이 호텔의 로비와 레스토랑을 채운다. 이들의 미팅 상대인 의회 고위 인사와 외교관 등이 자리를 함께하는 것은 물론이다.

‘로비스트’라는 말은 원래 워싱턴 윌러드 호텔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50년 세워진 윌러드 호텔은 백악관에서 5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위치로, 의회 인사 및 당대의 유명 정치인들이 자주 찾던 곳. 이들을 만나려는 이익집단 대표들이 이 호텔 로비에서 모이는 일이 일상화하면서 이들을 로비스트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제는 윌러드가 아닌 트럼프 호텔이 그 이름을 다시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위기다.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미국 전역에서 투자, 개발해 놓은 트럼프 호텔 및 관련 시설들은 상당수가 카지노 시설을 갖춘 관광 리조트이다. 그러나 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워싱턴 소재 호텔은 다르다. 호텔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백악관이 있고, 주변에는 상무부, 재무부, 교육부 같은 행정부 건물이 포진해 있다.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거나 정부 관련 행사를 하기에 가깝고 편리한 위치다.

로비스트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단순히 미팅의 편리함이나 동선, 위치 때문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유한 호텔을 사용함으로써 호의를 표시하고, 이를 통해 그에게 존재를 각인시키거나 줄을 대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게 워싱턴 정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트럼프 호텔은 주변의 다른 호텔보다 값이 비싼데도 수요가 많다는 것. 5성급 트럼프 호텔은 하루 숙박비가 최소 800달러(약 94만 원)를 넘어선다.

워싱턴의 한 로펌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변호사 A 씨는 “트럼프 호텔이 주변의 다른 호텔보다 값이 비싼 편인데도 그곳을 이용하는 동료 변호사가 많다”며 “이름이 갖는 상징성부터 뭔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느끼는 클라이언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핵심 정보가 공유되고 중요한 전략들이 논의되면서 이 내용을 파악하려는 외국 정보기관들의 도청, 감청 장치가 호텔 곳곳에 설치돼 있다는 말도 나온다. 미 정치전문 주간지인 ‘워싱턴 이그재미너’는 최근 트럼프 호텔에 대해 “스파이들이 접선하는 최적의 장소”라면서 “호텔 직원들이 도청, 감청 장치를 걸러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이라고 썼다.


○ 트럼프 딸-사위 집중 타깃

트럼프 호텔의 인기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커지는 로비의 수요와도 궤를 같이한다. 수시로 쏟아지는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성 발언과 예측 불가능한 결정, 이로 인한 정책적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트럼프 행정부 내부 상황을 파악하려는 외국 정부 및 기업들의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는 것. 참모진을 비롯한 행정부 인사들도 수시로 경질 혹은 교체되면서 정보 네트워크가 약해지고 있는 만큼 로비를 통해 내부에 줄을 대려는 외교 안보 정치 경제 인사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워싱턴에 위치한 외국 공관의 한 관계자는 “과거 정부에 비해 정책 기류나 내부 분위기를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게 공통된 이야기”라며 “면담 기회가 적고 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도 줄어들었다. 적극적으로 로비를 펼치지 않으면 본국에 보고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고 전했다. 대사관을 통한 공식 채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

로비스트 혹은 자문회사들은 1건당 20만∼30만 달러의 자문료를 받고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딸 이방카나 사위 재러드 쿠슈너는 집중 타깃이다.

중동의 ‘큰손’ 국가들이 트럼프 행정부와 접선 면을 넓히기 위해 쏟아붓는 비용은 특히 엄청나다. 석유 거래와 관련 분야의 개발 프로젝트 에너지 정책 등 경제 분야는 물론이고 미국의 대(對)중동 외교안보 정책이 중동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로비도 그만큼 공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

지난해 워싱턴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대리하는 로비스트들은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후 3개월 동안 트럼프 호텔의 객실 500개를 통째로 예약했다. 사우디 군 관계자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의회 인사들과 면담하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우디 측은 당초 버지니아주 북쪽에 위치한 호텔을 예약했으나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호텔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우디 측이 지불한 숙박비는 1인당 768달러. 당시 행사에서 트럼프 호텔에 건넨 비용의 총액은 27만 달러에 달했다.

비즈니스맨으로 거래와 수익에 민감한 트럼프 대통령의 기질을 아는 이 국가들의 ‘정치적 투자’는 워싱턴을 넘어선다. 대표적인 타깃이 트럼프 대통령의 본거지인 뉴욕의 트럼프 월드 타워.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외국 정부가 임차 계약 혹은 재계약을 하려고 국무부에 승인을 요청한 건수는 13건에 달한다.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 같은 중동국가들 및 태국 슬로바키아 유럽연합(EU) 같은 국가들이 이 명단에 올라있다.


○ 현직 대통령의 호텔 운영 수익, 괜찮을까

워싱턴 트럼프 호텔은 원래 우체국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다. 높은 종탑이 있는 이 고풍스러운 건물은 1899년에 완공된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우편 업무를 처리하던 곳. 이후 우체국이 문을 닫으면서 관세청 등 다른 정부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1970년대 주변에서 정부청사 단지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한때 철거 위기에까지 놓이게 된다.

이런 건물을 트럼프 가문의 지주회사 DJT홀딩스가 60년 계약으로 임차하면서 호텔로 탈바꿈시켰다. 호텔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문을 연 것은 2016년 9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그의 당선은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명의로 된 호텔을 운영하며 수익을 벌어들이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로비와 ‘뇌물’ 논란을 낳았다. 연방정부 건물을 임차해 사용하는 형식도 비판을 키웠다. 이 때문에 운영 및 세금 문제를 놓고 의회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고, 수시로 언론의 도마에 오르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이 이 호텔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그 상징성만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미국 헌법 1조 9항의 ‘소득(Emoluments)’ 조항은 정부 공직에 있는 사람이 의회의 동의 없이 외국 정부로부터 선물이나 대가를 받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외국 정부가 미국 내 자산을 사들이거나 임차할 때에는 국무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외국공관법(Foreign Missions Act)의 적용을 받는다.

그동안 이를 엄격하게 적용해온 정부가 최근 트럼프 호텔과 관련해 이 원칙을 허물 소지가 있는 결정을 내린 것을 놓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지난달 말 국무부가 7개국 정부가 미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도 뉴욕의 트럼프 월드 타워를 임차할 수 있도록 승인한 것. 이를 놓고 미 언론들은 “사실상 외국 정부의 ‘뇌물’ 제공으로 볼 수 있는 사안임에도 국무부가 대통령의 사익(私益)을 위해 이를 승인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직 대통령의 호텔 운영을 놓고 메릴랜드주와 워싱턴DC 지방정부의 법무장관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 사안은 법정으로까지 옮겨가 있는 상태. 의회는 “미국 국민들은 호텔의 운영 현황을 투명하게 알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의회는 트럼프 월드 타워의 임대와 관련된 자료를 요청했지만 단 한 번도 제출받지 못했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도널드 트럼프#로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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