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하정민]23년 전 납치 피해자가 부활시킨 독재자 망령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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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극우 정당 ‘복스’의 창립 멤버이자 바스크 무장단체 ETA의 납치 피해자인 호세 안토니오 오르테가 라라(61)가 대중을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스페인 극우 정당 ‘복스’의 창립 멤버이자 바스크 무장단체 ETA의 납치 피해자인 호세 안토니오 오르테가 라라(61)가 대중을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1996년 1월 스페인 북부 부르고스에서 교도관 한 명이 납치됐다. 바스크 독립을 외치는 무장단체 ‘바스크조국과자유(ETA)’가 호세 안토니오 오르테가 라라(당시 38세)를 그의 집 차고에서 낚아챘다. ETA는 석방을 대가로 로그로뇨 감옥의 ETA 수감자들을 바스크 교도소로 이송하라고 요구했다.

다음 해 7월 경찰이 구조할 때까지 라라는 532일간 창문도 없는 좁은 지하 감옥에서 지냈다. 1평(약 3.3m²)이 채 안 되는 길이 3.0m, 너비 2.5m의 공간. 세 걸음만 걸으면 방 끝에 닿았고 몇 미터 밖에 강이 있어 습기도 엄청났다. 체중만 23kg이 줄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불안, 우울증도 얻었다.

몸이 회복되자 그는 정치인으로 나섰다. ETA는 파시스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전 총통의 바스크 탄압에 반발한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1959년 탄생했다. 당연히 라라는 우파를 택했다. 2003년 국민당 후보로 부르고스 시장에 나서려다 당내 경선도 통과하지 못했지만 ‘납치 피해자’의 정계 진출 시도는 주목을 끌었다. 그는 2006년 중도좌파 사회당을 이끌던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당시 총리가 ETA와의 휴전을 발표하자 격렬히 반대했다. 언론 노출을 삼가던 그가 첫 TV 인터뷰에 나서 “ETA 타도”를 외쳤다. 이 주장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18개월을 ‘생지옥’에서 보낸 사내의 외침은 상당한 반향을 불렀다.

라라는 2008년 5월 국민당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품고 탈당했다.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내며 잊혀지는 듯했지만 11년이 흐른 2019년 지금 중앙 정계의 주역이 됐다. 그는 2013년 말 비슷한 이유로 국민당을 뛰쳐나온 전 동료 산티아고 아바스칼(43) 등과 반(反)분리독립·이민·이슬람의 극우정당 ‘복스’를 창당했다. 복스는 지난달 말 총선에서 1975년 프랑코의 죽음으로 찾아온 민주화 후 44년 만에 극우정당의 첫 원내 진입을 이뤘다. 설립 5년이 갓 넘은 초짜 정당이 350석 중 24석(6.8%)을 얻었을 뿐 아니라 독재의 상흔으로 사실상 ‘극우 무풍지대’였던 스페인 정치 지형도 바꿨다.

일각에서는 대표 아바스칼을 복스의 ‘얼굴’, 라라를 ‘정신’으로 표현할 정도로 그의 비중은 상당하다. 별다른 당내 직함도 없지만 정강, 노선, 지지층 공략 정책 등에 모두 그의 입김이 반영됐다. 아바스칼은 바스크 거점도시 빌바오, 라라는 바스크와 가까운 부르고스 출신이다. 하지만 이들은 익숙한 근거지 대신 최남단 안달루시아를 집중 공략하기로 했다. 모로코,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와 가까워 이민자 유입이 많고 농업 등이 기반이라 유달리 가난한 곳이다. 지난해 안달루시아 1인당 소득은 1만8360유로(약 2386만 원)로 스페인 17개 자치주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마드리드(3만1000유로), 바스크(3만 유로), 카탈루냐(2만7000유로) 등에 비하면 격차가 더 두드러진다.

안달루시아는 과거 사회당 텃밭이었다. 하지만 잘사는 북부와의 빈부 격차, 나아지지 않는 경제, 사회당의 난민포용 정책에 불만을 가진 민심은 복스로 쏠렸다. 복스는 지난해 12월 안달루시아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109석 중 12석(11%)을 차지했다. 극우 정당의 지방의회 진입도 민주화 후 최초다. 총선에서의 약진을 지난해 말 이미 예고했던 셈이다.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에서 보듯 프랑코 정권의 바스크 민간인 학살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범죄다. 당시 ETA가 ‘자위’ 차원의 무장투쟁을 벌인 점도 일정 부분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왜 프랑코 사후 21년이 흘러 지방 하급관리에 불과한 젊은 교도관을 납치했을까. 그때 ETA가 라라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생활인이 ‘스페인 민족주의’를 운운하는 극우 선동가로 변신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ETA의 맹목적이고 의미 없는 테러는 23년 후 의도치 않게 무덤 속 프랑코의 망령을 되살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라라의 주 공격대상이 프랑코 압제로 피해를 본 바스크와 카탈루냐라는 점이 씁쓸함을 더한다. 피는 언제나 더 큰 피를 부른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복스#호세 안토니오 오르테가 라라#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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