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85〉타인의 슬픔을 보는 눈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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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 슬픔에 붙들린다. 공감 능력을 갖고 태어난 탓이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타인의 슬픔’은 그 공감을 주제로 한 따뜻한 시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나도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타인의 슬픔을 보며/내 어찌 따뜻하게 위로해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시인은 공감의 문제를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으로까지 확장한다. “흐르는 눈물을 보며/내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자식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아버지가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감정이 또 있을까.

그런데 누군가에게 공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게 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슬픔으로 볼 수 있는 순수한 눈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타인의 슬픔을 보고 함께 슬퍼도 하고 위로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우리가 순수한 눈을 잃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당연히 타인의 슬픔이나 눈물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남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니 그 눈물에 붙들릴 리가 없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목 놓아 우는 사람을 조롱하고 비하하고 짓밟는 일이 가끔씩 생기는 것은 타인의 슬픔을 보는 순수한 눈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흘리는 비통한 눈물 앞에서는 굳게 닫힌 하늘의 문도 열리고,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신도 인간 옆에서 신음한다지 않은가. “그분은 우리의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우리 곁에 앉아 신음하십니다” 그러니 같은 사람으로서 슬픔에 잠긴 사람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모욕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대상이 누구든.

그래서 블레이크의 타인의 슬픔은 상식을 노래한 시다. 타인의 슬픔에 붙들리는 공감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위대한 선물이지만 타인의 슬픔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으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상식. 이 상식이 삶을 지탱하는 윤리의 기초를 이룬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타인의 슬픔#윌리엄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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