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는 암울한 일제강점기 민족의 ‘희망자본’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도진순-박명규 교수 대담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왼쪽)와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두 교수는 “임정 수립 100주년은 잔치로 끝낼 것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씨앗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왼쪽)와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두 교수는 “임정 수립 100주년은 잔치로 끝낼 것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씨앗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뿌리 깊은 나무’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백범 김구와 현대사 연구에 정통한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6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과 한국사회학회장을 지낸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64)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머리를 맞댔다.》

―우리 역사에서 임정의 의미는….

▽박명규=암울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희망 자본’, ‘상징 자본’이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에게 임정은 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학도병으로 끌려간 김준엽과 장준하가 일본군을 탈출한 뒤 한국광복군을 찾아간 것도 임정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민중이 공화국의 주권자라는 개념이 명료하게 헌정 원리로 자리 잡은 것도 임정이 시작이고, 제헌헌법으로 이어졌다.

▽도진순=임정 수립의 바탕이 된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거대한 수원(水源)과 같다. 농민, 여성, 노동자, 학생의 대각성이 생겨났고, 이들이 독립운동의 물결로 일어났다.

―100주년 맞아 관련 행사도 많았다.

▽박=3·1운동과 임정의 가치를 알리는 건 뜻깊은 일이다. 양적으로 많은 행사가 있었던 것은 좋으나 질적 풍성함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세계적 평화질서 구축과 3·1운동을 연결하는 시야의 확장이 필요하다. 100주년을 맞아 토론의 쟁점들이 새로 생겨야 앞으로도 주요 화두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김구 주석(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기 직전인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에서 찍은 기념사진. 11일로 수립 100주년을 맞는 임정은 1919∼1945년 26년 넘게 그 간판을 지켰다. 이는 세계 민족해방운동사에서도 드문 일로 평가된다. 동아일보DB
김구 주석(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기 직전인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에서 찍은 기념사진. 11일로 수립 100주년을 맞는 임정은 1919∼1945년 26년 넘게 그 간판을 지켰다. 이는 세계 민족해방운동사에서도 드문 일로 평가된다. 동아일보DB
▽도=대통령직속 100주년 기념위의 최근 학술포럼 제목이 ‘3·1운동에서 촛불혁명으로, 임정 수립에서 통일 한반도로’다. 일부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호명하면서 ‘촛불혁명’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강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임정을 통일과 연결짓기 위해서는 임정이 지난날 광복 직후 국내에 들어와 좌우·남북이 대립하는 국면에서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성찰해 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다.

▽박=‘3·1혁명’이냐 ‘3·1운동’이냐는 표현 문제는 최근 불거진 게 아니다. 제헌헌법 초안도 ‘기미삼일혁명’으로 출발했다. 최근 3·1운동을 민족적 저항뿐 아니라 민중의 각성,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기원으로 조명하면서 혁명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일리가 있다. 다만 논의가 자연스럽게 쌓여가면서 시대적인 규정으로 용어가 자리 잡는 것인 만큼 학계의 토론을 더 할 필요가 있다. 주체들의 다양한 면모와 성격을 드러내는 작업도 함께 이어졌으면 한다.

▽도=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 3·1운동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일면적 파악이 심했다. 2·8독립선언서나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이 보인다.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제국들이 1차대전으로 무너지니, 폴란드는 1918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곧바로 독립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정당과 달리 투표 등으로 국민의 주권을 확인해야 해 5년 정도의 길지 않은 기한을 예상하고 수립된다. 그러나 두루 지적하다시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 식민지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동아시아에서 일제의 힘은 더 강해졌다. 임정은 수립 5년도 채 안 돼 해체론 등 대대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박=기미독립선언서는 다소 원론적으로 느껴져도 문명론적 지향이 뚜렷해서 그만큼 긴 울림을 갖는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형태로 독립운동을 추구한 것도 193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 카이로 회담 등 전후 처리 의사 결정에 한국의 의지를 관철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그런 점에서 임정이라는 조직 형태를 지킨 것은 타당했다고 본다. 임정이라서 명분이나 국제적으로 잠정적 대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그나마 가졌던 것 아니었을까.

▽도=우리가 국제 정세를 낙관적으로 오판한 것이 1919년만은 아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기운 시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백범일지’나 ‘안응칠 역사’, 2·8독립선언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2차대

전 종전으로 광복되자 마찬가지 실수를 했다. 물러가는 일본만 보고 ‘해방’이라 낙관했지만, 곧바로 신탁통치가 거론되고 분할 점령된 국제 정세를 당면하게 된다. 이러한 엄중한 정세를 직시했더라면 좌우대립이나 정권 투쟁이 실제보다 덜했을 것이다.

▽박
=임정은 30년 가까운 실천의 물줄기다. 다양한 흐름이 합류했고 시대에 따라 형태도 변했다. 이를 마치 결집된 단일한 정부 캐비닛 조직으로 이해하는 건 잘못이다. 정통론적 시각으로 접근해 임정 이외의 운동이나 세력, 주체 조직을 평가절하하거나 비정통을 가르고 배제하는 시각은 넘어서야 한다.

▽도=전적으로 동의한다. 협애한 정통론으로는 항일독립운동의 폭과 깊이, 해방 정국의 역동성을 포괄할 수 없다. 광복 직후 중국 충칭에선 임정 내부에서도 해산론이 거론됐다. 백범은 1945년 당시 개천절인 11월 7일 중국 상하이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연합국에 부끄럽고 감사하다”는 연설을 했다. 귀국 이후 임정법통론의 강화를 추진했지만 남한 내 인민공화국 세력과 좌파, 미군정, 북한의 김일성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등 3면으로 대립했다. 우파 내의 이견도 있었다. 결국 미군정의 자문기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흡수돼 버린다. 김창숙 선생은 이를 ‘임정에 의한 임정의 해소’라고 했다. 정당과 달리 정부 형태는 합작과 연대가 만만치 않다.

―오늘날 정세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

▽도=한반도를 분단체제로 바라보면 ‘통일’이 목표가 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더 위력적인 것은 북-미 대립을 축으로 하는 정전체제다. 동서독과 달리 우리는 전쟁을 치렀다. 정전체제에서는 정치, 군사,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 개성공단 같은 경제협력도 앞으로는 정치군사적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박=남북한은 유엔 회원국이다. 만약 북-미 간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고 평화협정이 맺어진다면 북한이 가진 국가로서의 지위, 성격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분단국체제’라는 인식 틀을 제안한다. 성격이 매우 다른 두 분단국가가 어떻게 공존하고 평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관한 규율과 틀을 마련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도=“진정한 선구자들은 미래뿐만 아니라 잊혀진 과거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는 보르헤스의 구절을 좋아한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이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직시하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화두를 끄집어낼 수 있게 반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박=100주년을 마무리한다는 느낌보다 새 100년을 준비한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미래를 향한 열린 감수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임시정부#백범 김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