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안에 없는 보물은 밖에서 찾아 내것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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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신약개발 강자로 떠오른 유한양행의 개방형 혁신전략

지난해 11월 5일 유한양행은 글로벌 제약사 얀센바이오테크에 비소세포 폐암 치료 신약 ‘레이저티닙’을 약 1조4000억 원에 기술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한국 제약업계 사상 단일 계약으로 최대 규모의 수출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올 1월 5일에는 글로벌 제약사인 길리어드사이언스에 비알코올성 지방간염(NASH) 신약을 약 9000억 원에 이전하며 또 한 번 1조 원에 육박하는 계약으로 시장을 놀라게 했다. 지난해 7월 미국 제약사 스파인바이오파마에 약 2400억 원에 퇴행성 디스크 치료제를 넘긴 것을 포함하면 반년 새 3건의 대형 계약을 차례로 성사시킨 셈이었다.

무엇보다 업계를 놀라게 한 소식은 계약의 규모도, 건수도 아니었다. 계약을 성공으로 이끈 기업이 다름 아닌 ‘유한양행’이었다는 점이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이 회사에서 신약 개발 프로젝트(파이프라인)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던 회사가 2015년 3월 새로운 수장인 이정희 대표의 취임을 기점으로 발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취임 전 9개였던 신약 파이프라인은 2017년 말 19개, 지금은 27개로 각각 2배, 3배로 늘어났다. 연구개발(R&D) 투자비용은 △2014년 580억 원 △2015년 726억 원 △2016년 865억 원 △2017년 1037억 원 △2018년 1105억 원으로 해마다 늘었고 매출 대비 R&D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도 5.7%에서 7.3%로 커졌다.

도대체 지난 4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한때 신약 개발에 한참 뒤처졌다는 비판을 받던 유한양행이 갑자기 신약 파이프라인 27개를 보유한 국내 제약업계의 벤치마킹 모델로 변신한 이유를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분석했다. DBR 270호(4월 1일자)에 실린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 달라진 회사의 사명 “매출 신장에서 R&D로”

2015년 3월 회사의 중장기 전략을 짜던 경영진은 연구소 내부에 신약 후보물질의 씨가 말랐다는 냉혹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1926년 설립된 회사는 창립 90주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향후 100주년의 방향을 세우기 위해 연구소 안을 뜯어본 결과는 참담했다. 2013년 매출액 기준 제약사 1위 자리를 탈환하고, 2014년 업계 최초로 매출 1조 원을 달성하는 등 겉보기에는 모든 지표가 양호했다. 그러나 매출 신장에 전력을 다하다 보니 신약 개발은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였다. 오너 없는 임기 3년의 전문경영인 체제에선 어느 리더도 위험 부담이 큰 R&D에 총대를 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임 최고경영자(CEO)의 취임 후 연구소의 위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유한양행의 또 다른 100년을 기약하려면 해외 약을 수입해 파는 상품매출 위주의 수익구조와 몸집 불리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매출 신장보다 미래 성장 동력인 R&D에 방점을 두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어 2015년을 유한양행의 ‘개방 원년’으로 선포했다. 기술을 밖에서 조달하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전략을 채택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힌 것이다. 혁신에 필요한 내부 역량이 부족하니 외부의 힘, 특히 벤처 생태계의 힘을 빌리자는 게 이 전략의 골자였다.

이 대표는 변화된 사명을 직원들에게 퍼뜨리기 위해 외딴섬처럼 고립돼 있던 연구소와의 소통에 나섰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노량진 본사가 아닌 경기도 용인 기흥연구소로 출근해 연구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연례행사에 가까웠던 현장 방문을 상시화한 것이다. 90년간 회사를 지배하던 ‘순혈주의’도 깨버렸다. 내·외부 출신을 가리지 않고 전문가를 발탁해 요직에 앉혔고, 연구소 내 10명의 팀장 가운데 절반이 교체되는 파격적 인사가 이어졌다.

○ 빠른 의사결정으로 외부 유망 기술 선점

외부 유망 기술을 회사 내부로 흡수하는 유한양행의 ‘내향형(inbound) 개방’에서 핵심은 ‘스피드’였다. 2015년 5월 유한양행이 바이오 벤처 오스코텍이 발굴한 신약 후보물질 레이저티닙을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같은 해 7월 최종 계약을 맺고 기술을 사들이기까지 불과 1개월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통상 연구소의 기술 평가와 연구위원회 심의부터 이사회 승인에 이르기까지 길면 6개월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사자들조차 놀란 속도였다. 입찰에서 승기를 잡은 것도 연구소장 결단이 내려지자마자 연구위원회 결재까지 일사천리로 받아냈기에 가능했다. 다른 기업들의 경우 경영진에게 후보물질의 가치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다 기회를 놓친 부분이 크다는 분석이다.

연구소 내 R&D 엔진에도 변화가 생겼다. 유한양행은 오스코텍을 상대로 통상 3년 걸릴 전임상을 1년 만에 끝내겠다는 구체적 타임라인을 내걸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연구소 내 센터 2곳과 10개 팀 사이의 칸막이를 걷어내고 개발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인사평가 방식도 바꿨다. 팀 중심으로 이뤄지던 평가 방식을 신약 개발 프로젝트 중심으로 전환해 팀별 ‘각개 전투’로 인한 비효율을 뿌리 뽑았다. 핵심성과지표(KPI)가 달라지자 과제 중심으로 연구원들이 똘똘 뭉치기 시작했고, 한 달에 한 번씩 프로젝트 리더(PL)가 여는 과제전략회의 참여나 몰입도도 높아졌다.

○ 글로벌 파트너 겨냥한 맞춤형 전략 수립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이 성공하려면 국내의 원석을 도출하는 내향형 개방에만 그쳐서는 안됐다. 회사 안팎에서 좋은 기술을 발굴했으면, 가치를 더해 세계 시장에 내놓는 게 파트너와의 공동 목표였다.

이에 유한양행은 처음 후보물질을 확보하는 단계부터 내부 기술을 외부 경로를 통해 사업화하는 ‘라이선스 아웃’을 염두에 두고 파트너 맞춤형 전략을 짰다. 그동안 국내 제약사들이 라이선스 아웃 경험이 부족해 전략 없이 여기저기 파트너들을 찔러봤던 것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2015년 레이저티닙 도입과 동시에 해당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4, 5명을 수소문해 ‘글로벌 임상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철저한 시장조사를 펼쳤다. 이를 바탕으로 파트너십을 맺기 전부터 잠재 고객인 얀센과 1년 이상 꾸준히 교류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발견하고 탐색전을 펼쳤다. 이희상 성균관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은 “오랜 기간 파트너와 물밑 접촉을 하면서 상대가 원하는 데이터를 역으로 갖춰나간 ‘역방향 접근’이 유한양행 오픈 이노베이션의 두드러진 성공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김윤진 기자 truth311@donga.com
#신약개발#유한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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