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 비교 좀 그만, 나는 나!”… 부모가 강요하는 성공방식 거부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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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新성공법칙] <2> 부모가 정해놓은 성공 공식을 거부하다
학벌보다 자신만의 행복루트 개척

‘웹뉴(웹툰 뉴스) 컬래버레이션’ 2회 ‘엄친의 벽’ 웹툰은 ‘아가씨와 우렁총각’으로 이름을 알린 제이드 작가가 그렸다.
‘웹뉴(웹툰 뉴스) 컬래버레이션’ 2회 ‘엄친의 벽’ 웹툰은 ‘아가씨와 우렁총각’으로 이름을 알린 제이드 작가가 그렸다.
《“반에서 누가 가장 ‘엄친딸’ 같아요?” “….”
5일 서울 성동구 무학여고. 시끌시끌하던 1학년 3반 교실에 정적이 흘렀다. ‘엄친딸’을 지목해달라는 요청에 학생들이 잠시 망설였다. 이내 교실에선 “그걸 왜, 굳이 찾아야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날 취재팀은 서울의 고등학교 2곳을 찾아 엄친아, 엄친딸이란 말을 바라보는 청년들의 인식을 탐구했다. 명문대, 전문직이라는 기성세대 성공 법칙의 시작인 이 단어에 대한 청년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다. 학생들에게 ‘엄친딸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란 질문부터 던졌다. 김수민 양(16)은 “사람마다 특성이 다 다른데 왜 무엇이 좋다고 먼저 규정해 놓고 그렇게 부르는지 의문이 든다”고 얘기했다. 엄친딸은 어른들이 정해 놓은 틀에 갇혀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친구들 같다는 것이다.》


‘엄친딸’하면 떠오르는 말, 여고생들 답은… 5일
 서울 무학여고 1학년 3반 학생들이 ‘엄친딸’에 대한 생각을 칠판에 쓰고 있다. 학생들은 ‘비교하지 마세요’ ‘엄마! 바랄 걸 
바라세요!’ ‘나 자체로 좋아해줘요♡’ 같은 솔직한 글로 더 이상 ‘엄친아’를 추구하지 않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보여줬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엄친딸’하면 떠오르는 말, 여고생들 답은… 5일 서울 무학여고 1학년 3반 학생들이 ‘엄친딸’에 대한 생각을 칠판에 쓰고 있다. 학생들은 ‘비교하지 마세요’ ‘엄마! 바랄 걸 바라세요!’ ‘나 자체로 좋아해줘요♡’ 같은 솔직한 글로 더 이상 ‘엄친아’를 추구하지 않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보여줬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제 꿈을 찾아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딸기농사에 스마트 농업기술을 도입하려는 이하영 씨(21)도, 명문대 타이틀을 버리고 요리를 배운 김현성 씨(37)도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들뿐 아니다. ‘부장님처럼 살기 싫다’는 요즘 청년들은 유튜브 크리에이터, 임산부용 과자 제작자, 웹소설 작가 등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저게 직업이냐’란 분야에서 성공하길 원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기성세대인 ‘부모’와의 갈등이 일어난다. 대한민국 부모 대다수는 자녀가 명문대에 진학해 전문직으로 성공하길 바란다. 이런 바람이 ‘엄친아, 엄친딸’이란 말에 투영돼 있다.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와 취업정보 사이트 진학사 ‘캐치’가 청년 452명에게 ‘부모님 등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성공 기준’을 묻자 ‘높은 연봉 등 경제력’(34.4%)과 ‘안정적 직장’(22.2%)이란 응답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정작 청년들은 ‘엄친아, 엄친딸’에 호의적이지 않다. 스스로 정한 성공법칙을 찾고, 그 안에서 다양한 재미와 보람을 추구하는 요즘 청년들에게 이 단어는 꿈을 막는 장애물과 동의어다. 취재팀은 엄친아가 되기를 거부한 채 새로운 진로를 찾아 나선 청년들을 만났다.


▼ 농사에 꽂힌 열네살 “딸기 농부 될래요” 한달동안 부모 설득 ▼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2005년 전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의 학습 시간으로 유명한 한국에서 15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이 말은 대학 진학에 모든 것을 거는 청소년을 대표하는 말이 됐다.

이날 오후 찾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고 3학년 8반 교실에서도 ‘엄친아’는 청년들에게 꿈을 획일화하는 장애물로 여겨졌다. 황희준 군(18)은 “원래부터 부모의 기준에서 만들어진 말”이라며 “자녀 입장에서 엄친아가 이상적인 존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부모의 벽 넘어서 내 길 찾는 청년들

이를 반영하듯 ‘엄친아’의 공식에 갇혀 있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는 청년이 늘어나고 있다. 광주에 사는 이하영 씨(21·여)의 직업은 ‘농부’다. 농사에 ‘꽂힌’ 건 열네 살 때였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의 책을 읽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문제였다. “농업고에 가겠다”는 딸의 폭탄 발언에 이 씨의 부모는 뜨악해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해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것이 최고라며 만류했다.

이 씨가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며 한 달 넘게 설득하고서야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하라”는 부모의 허락을 얻을 수 있었다. 올해는 논농사를 준비하고 있는 이 씨는 훌륭한 ‘딸기 농부’가 되는 것이 꿈이다. 가장 좋아하는 맛 좋은 딸기를 4계절 내내 재배해서 사람들에게 먹이고 싶어서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수석 입사했던 김현성 씨(37)는 입사 2년 만인 2014년 사표를 냈다. 오랜 셰프의 꿈을 이루려 결단을 내린 것이다. 퇴사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잠이 안 온다”며 반대했다. 서른두 살의 초짜 요리사 지망생을 받아주는 가게가 없어 음식점 서빙부터 했고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영국에서 연수를 받은 뒤에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열었다. 김 씨는 “내가 갈 길을 내가 정해 후회는 없다”며 “부모님도 이제는 내 길을 이해해주신다”고 말했다.

○ “엄친아·엄친딸 효용성 줄어들어”


서울 양진초병설유치원에서 근무하는 ‘남자유치원 교사’ 김건형 씨(32)처럼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성세대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낸 경우도 있다. 그는 “주변에서 남자가 왜 유치원 교사를 하냐는 눈초리가 있었다”며 “하지만 난 이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엄친아를 거부하는 청년들에게 부모들도 하고 싶은 말은 있다.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웹툰작가가 꿈인 중학생 자녀를 둔 A 씨는 “그동안 공부는 100명 중에 50등을 해도 먹고살 수 있었지만 다른 분야는 1등을 해도 살아남기 어렵지 않았냐”며 “엄친아를 강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현재 A 씨는 자녀의 목표를 인정하고 애니메이션고 진학을 돕고 있다.

A 씨처럼 자녀가 전형적인 ‘엄친아’가 되길 바라는 분위기가 약해진 것도 감지된다. 중3 자녀를 둔 학부모 송모 씨(43)는 “좋은 대학에 입학해도 졸업 전부터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게 현실”이라며 “엄친아보다는 아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분야를 찾도록 돕는 게 목표라는 엄마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엄친아가 되기 위해 발버둥쳐도 부모 세대만큼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가치관에 맞는 직업을 찾으려는 흐름이 커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 “4050이 먼저 돌아보세요, 엄친아-엄친딸로 행복했는지” ▼

청년들 ‘좋은 학벌=성공’ 인식 줄어… “학벌은 중요한 요소 아니다” 42%

“좋은 학벌이 플러스가 될 순 있지만 필수는 아니다. 큰돈 벌지 않아도 원하는 일에 도전하며 취미를 즐기면 성공한 삶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지난달부터 이달 초까지 설문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통해 청년들에게 들은 ‘성공의 조건’은 이렇게 요약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엄친아’, ‘엄친딸’의 기준으로 여겨졌던 ‘좋은 학벌’이 전만큼 성공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동아일보와 취업정보 사이트 진학사 ‘캐치’가 청년 452명에게 ‘학벌이 행복과 성공에 얼마나 중요하다고 보느냐’고 물었더니 42.0%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응답했다. 학력자본(좋은 학벌)이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는 경험이 쌓인 결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명문대와 안정적 직장을 향한 무한 경쟁 레이스에서 승리하더라도 얻는 것이 별로 없다면 정해진 레이스 대신 자신이 원하는 속도와 방향을 향해 달린다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청년들은 오히려 성공과 행복을 스스로 규정하고 자기성취감이 높은 세대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재 20대는 타인의 시선이나 물질적 기준이 아닌 주관적인 만족을 추구할 수 있게 된 세대”라고 설명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정말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했던 4050 세대가 대다수일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이 신(新)청년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자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해 넓은 시야로 조언한다면 각 분야에서 즐겁게 일하는 청년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런 신청년들이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는 ‘소확행’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함께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동아일보 창간기획 ‘청년들의 신(新)성공법칙’ 특별취재팀은 기성세대와 달라진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대나무숲 e메일’(youngdream@donga.com)을 개설했다. 자신의 다짐을 비롯해 부모나 직장 상사, 정책담당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요구사항, 도움이 필요한 내용 등을 자유롭게 밝힐 수 있다.

특별취재팀
▽팀장 김윤종 정책사회부 차장 zozo@donga.com
▽김수연(정책사회부) 김도형 김재형(산업1부)
황성호(산업2부) 김형민(경제부)
최지선 기자(국제부)
#엄친아#엄친딸#청년#성공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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