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네 새끼, 혹은 우리의 아이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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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윤 잡지 에디터
오성윤 잡지 에디터
내가 유독 난감해하는 질문이 있다. ‘아이들을 좋아하느냐’는 질문. 솔직히 말하자면 나와 무관한 유아나 아동에게서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하자면 그것도 썩 개운치 않다. 질문자는 십중팔구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일 터. 아이들의 부주의함과 시끄러움과 축축함까지 사랑하는 그들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 아이를 싫어할 확률도 높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묻는 대로 답하지 못하고 늘 장황한 답을 떠올린다. “좋아하진 않지만 호의를 가지려 노력합니다.” 호의, 이를테면 아무리 피곤한 날도 모르는 아이와 눈이 마주칠 때는 애써 웃어 보이는 그런 태도 말이다. 내게 이런 생각을 심어준 것은 8할이 해외에서의 경험이다. 문화권을 막론하고 시민의식이 발달한 대다수의 도시에서 일련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대개 미덕이라기보다 ‘기본값(Default Value)’처럼 깃들어 있으니 어쩌면 호의라는 표현도 거창하겠다. 아이들을 감내하고 환대하는 것은 그저 사회의 책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잡지 에디터인 내게 최근 유독 난감하게 다가오는 표현도 있다. “저희 업소는 ‘노키즈존(No Kids Zone)’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이런 설명을 들으면 나는 원고지를 붙들고 한참을 고민한다. 해당 정보를 써넣자니 일련의 방침과 표현을 긍정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고, 생략하자니 누군가가 헛걸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키즈존 업소를 싸잡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국내에는 아이들의 안전사고에 대해 사고 발생 업소의 책임을 물은 판례가 여럿 있는데, 이는 영세하고 일손이 적은 업소에 더 불리한 조건이다. 아이를 수용하지 못할 여건이라는 게 있다는 뜻이다. 유아나 아이들의 존재가 개별 업소에서 표방하는 서비스 특성에 상충한다는 해명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다만 너무 손쉬운 방편이다. 노키즈존이 개별 선택 차원을 넘어 일종의 ‘현상’이 되고, 그마저 넘어서 일반적 ‘업태’로 자리 잡고 있다면 그 흐름에는 분명 문제 제기와 개선이 필요하다. 문제 될 게 없다는 주장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아르바이트 직원에게 폭언 폭행을 일삼는 일부 중장년층을 빌미로 ‘노엘더리존(No Elderly Zone)’이 확산된대도 이렇듯 수긍할 수 있을까? 일부 몰지각한 관광객을 빌미로 해외 요식업계에 ‘한국인 사절 식당’ 바람이 분대도 그것이 합리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데 노키즈존의 확산에만 쉽게 동의할 수 있다면 그 저변에는 아동혐오가 숨어 있을 확률이 높다.

세간에 이런 유행어가 떠돈 적이 있다. “네 새끼 너한테나 예쁘지.” 어조 차이는 있겠으나, 첫 문단에서 고백했듯 나는 해당 표현의 작동 원리를 썩 잘 이해하는 축의 사람이다. 그러나 모든 사안에서 아이들을 ‘네 새끼’로만 판단하는 사회는 심각한 문제를 가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런 말도 있기 때문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모든 아이에겐 사회 안에서 충분히 실수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사회화’라고 부른다. 그러니 노키즈존에 찬동하는 이유가 단순히 편의 차원이라면 재고하길 권한다. 어른으로서, 시민으로서 말이다.
 
오성윤 잡지 에디터
#노키즈존#노엘더리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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