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동정민]北대사관 사건이 남긴 숙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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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민 파리 특파원
동정민 파리 특파원
지난달 29일 오전 10시경, 스페인 마드리드 북부 외곽 주택가에 위치한 주스페인 북한대사관의 주차장 후문이 열렸다.

이 문으로 북한 유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걸어 나왔다. 대사관 정문에 모여 있는 취재진과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후문으로 나온 것이다. 높은 담과 울창한 나무에 가려졌지만 대사관 안에서는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로 바깥을 볼 수 있다. 그는 “나는 대사관에서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대사관 안이 사건 이전과 크게 다른 분위기는 아니다”라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한 채 버스를 타고 떠났다.

후문이 열렸을 때 주차장에 놓인 검은색 차량 3대가 보였다. 2월 22일 에이드리언 홍 창 일행이 대사관 습격 이후 타고 달아났다가 시내와 외곽에서 발견된 대사관 소속 차량들이다. 한 달간 침묵했던 북한은 지난달 31일 이 사건을 “엄중한 테러행위”로 규정하며 스페인 정부에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기자는 지난달 30일 스페인 유력 일간지 엘문도의 파블로 에라이스 기자를 만났다. 이 사건을 쭉 취재해 온 에라이스 기자는 “스페인으로서는 자국의 외국 대사관 안에서 비밀 작전과 습격이 벌어진 굉장한 사건”이라며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스페인 고등법원은 이번 사건을 국가 안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규정하고 판사가 직접 수사를 지휘하도록 했다. 호세 데라 마타 판사는 스파이, 테러, 정치인 부패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주요 사건을 수사하는 베테랑이며,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독종 판사로 유명하다고 에라이스 기자는 전했다.

스페인은 2017년 북한 미사일 실험 이후 유럽에서 가장 먼저 북한대사관 대사와 직원을 추방할 정도로 북핵 개발과 북한 인권 문제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는 북한대사관을 ‘피해자’로, 습격자인 자유조선을 ‘범죄 용의자’로 규정했다. 스페인 수사 판사는 위조된 운전면허증을 사용하고, 대사관 안에서 폭력과 불법 구금, 절도, 협박을 한 이들을 최대 28년형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스페인 당국은 이번 사건에 미국과 한국 정부가 개입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홍 창이 지난달 27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을 방문해 관련 문건을 전달하면서 미 정부 배후설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또 신원이 확인된 홍 창 일행 모두가 한국 국적이거나 출신이어서 수사 초기부터 한국 정부 개입 가능성을 의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건은 김정은 독재를 비판하고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자유조선의 ‘습격’인가, 김정은 정권과의 관계 개선에 찬물을 끼얹는 ‘테러’인가, 아니면 제3국에서 벌어진 ‘범죄’인가.

자유조선은 1일에도 “큰일을 준비 중”이라며 추가 행동을 예고했다. 김정은의 이복 조카 김한솔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의 행보는 한국 정부에 또 다른 숙제를 남긴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마드리드에서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
#주스페인 북한대사관#대사관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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