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을부터 대도시까지 비슷한 시기에 3·1운동 전개한 비결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일 15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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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밤·권보드래 지음·647쪽
2만7000원·돌베개


대한독립 만세, 아우내 장터, 유관순, 태극기….

명색이 한국 근대사의 하이라이트인데 머릿속 연관 검색어는 얄팍하기 그지없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최근 쏟아지는 저작물들은 그래서 더 소중하고 반갑다. 권보드래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문화사 맥락에서 3·1운동을 그려냈다. 신문조서와 재판기록, 잡지, 논문을 총망라해 당일의 실체에 바짝 다가섰다.

3월 1일의 만세 시위는 기실 당일만의 사건이 아니다. 한일합방 이후 9년 간 응축된 에너지가 터져 나온 일성이요, 이후 이어진 숱한 사건들의 자궁이다. 이날의 경험으로 공화정 체제에 대한 필요성이 싹텄고, 혁명을 꿈꾸는 무리가 생겨났다.

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 시골 마을부터 대도시까지 비슷한 시기에 운동을 전개한 건 나름의 체계 덕분이었다. 제 1·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민족은 독립을 선언한다. 조선 지식인들도 “전체적 조직이 결여된 상태에서 국제정세를 감지하고 독립의 가능성을 민감하게 포착한 여러 주체들은 연결 없이, 소통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선언’을 계획한다.”


다양한 버전의 선언서는 종교·학교 조직을 타고 전국으로 배포돼 변형을 거듭한다. 평안북도 안주군의 20세 조성룡은 ‘자유신보’와 ‘2000만 동포에 대한 경고문’을 추가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아침 8시30분 남대문역 앞’으로 시위 일정을 구체화했다.

독립에의 열망 속에 자발적 대표들도 여럿 탄생했다. 강화도의 은세공업자 유봉진은 ‘결사대표’를, 군산 사람 양봉식은 ‘국민대표’를 자처하며 식민권력에 맞섰다. “1910년대는 세계적으로 혁명의 연대였지만 3·1운동만큼 자발적인 동시에 전국적인 봉기 양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개인은 독립에 각자의 불만과 희망을 투영했다. 조선인이란 이유로 모멸의 일상을 살던 이들은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길 소망했다. 세금과 부역 동원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생활주의’적 기대도 도드라졌다. 천도교도들은 독립 뒤 사회적 역할을 꿈꾸기도 했다.

3·1운동은 정치적 공론장 역할도 했다. “모든 정치적 논의가 금지된 공백 속에서 (3·1운동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공통감각”을 형성했다.


뜬금없이 3·1운동과 사랑에 빠진 저자는 최고 난도의 퍼즐 앞에 여러 번 현기증을 느낀다. 하지만 끝내 책임을 다해 실감나게 당대를 되살려냈다. “장군과 대신을 바라던 청년들의 꿈이 식민 통치 이후 교사와 순사보 정도로 졸아들었다”, “소외계층이 3·1운동에 참여하며 사회적 입신을 추구하는 효과를 거뒀다”, “약소국으로서 사회진화론은 위험한 자극제”라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1910년 누군가의 생애를 상상해보자. …거리에 나가면 오직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는 일본인이 많았고 오직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모멸이 다반사였다.”

저자는 거듭해 역사학의 기초를 아쉬워한다. 하지만 문학적 상상력으로 틈새를 매운 전략이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따듯한 3.1운동 책은 만나지 못했을 테다. 역사에 대한 애정이 깊은 눈과 만나 풍요로운 서사를 일궈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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