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정은]“만나봐야 영양가 별로네” 워싱턴, 韓외교관에 시큰둥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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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왜 만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새로운 정보 없이 매번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데….”

지난해 한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만나자는 제안을 받은 미국 워싱턴의 한 한반도 전문가가 지인들에게 투덜대며 했다는 말이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남북 경협을 적극 추진하며 워싱턴 싱크탱크 인사들을 상대로 그 취지를 널리 알리려 했다. 하지만 일부 거물급 인사들이 워낙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한국 외교관들이 일정을 잡기도 쉽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최근 주미 한국대사관은 공공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참사관급 인력을 늘렸다. 북핵 협상과 동맹 이슈를 담당하는 정무과 인력을 줄이는 대신 공공외교 쪽을 강화했다. 외교부 북미국과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경력을 쌓아온 인력을 투입한 것도 눈에 띈다. 북미, 북핵 업무를 맡아온 외교관들이 갑자기 공공외교를? 그것도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 및 방위비 분담금 협상 같은 민감한 사안이 산적한 시기에?

긴박하게 돌아가는 현안에 비해 공공외교는 상대적으로 한가해 보인다. 문화, 예술, 전통, 역사 등의 분야에서 현지 국민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심고 신뢰를 쌓는 것이 공공외교의 사전적 정의 아닌가. 하지만 요즘 주미 한국대사관이 바라보는 공공외교는 사뭇 다르다. 최대 관심 대상은 워싱턴 싱크탱크. 학자와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한 싱크탱크 인사들 접촉이 주요 현안이다.

문제는 이들이 간단한 상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워싱턴 한반도 전문가들은 수시로 미국 행정부 고위인사로 기용된다. 행정부에서 일하다가 싱크탱크로 오는 이들도 많다.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비롯한 국무부 인사들도 이들에게 자주 정책 자문을 한다. 그 과정에서 긴밀한 정보가 오가고, 행정부 정책 방향에도 상당한 입김을 넣는다.

한반도 전문가의 수도 대폭 늘었다. 과거에는 이들이 다루는 주제 또한 일본 및 중국 관계, 핵무기 기술 등에만 국한돼 있었다. 최근 전문가들은 소셜미디어와 언론 코멘트를 통해 북한에 대한 다양한 언급을 하느라 바쁘다.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한마디로 장이 섰다. 너도나도 북한에 대해 한마디씩 경쟁적으로 내놓는다”고 전했다.

이들의 북한 관련 언급에는 가시가 돋아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아무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북한에 대한 불신을 감추지 않는다. 북한 핵과 미사일 시설을 분석한 보고서 제목에도 날이 서 있다. 발표 시점 또한 묘해 ‘중립적 연구 결과’라는 설명을 무색하게 할 정도다. 이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대사관은 갑자기 불어난 공공외교 업무를 버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지난해 처음으로 공공외교 공사 자리를 신설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지 않는다고 본부로부터 채근당하는 눈치다. 이 때문에 조윤제 대사도 공공외교 분야 조직개편을 놓고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고 한다.

오랫동안 북핵 협상 과정을 지켜보며 “북한에 여러 번 속았다”고 말하는 한반도 전문가들에게 간헐적으로 밥을 사고 이벤트를 진행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동안 축적해온 북한 관련 정보와 협상 패턴으로 논리를 무장한 워싱턴 전문가들 앞에서 잘못하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 “매번 똑같은 정부 입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는 차가운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북-미 관계, 북핵 문제를 다루던 외교관들이 공공외교란 이름의 틀에 갇혀 실력 발휘를 못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공공외교도 이제 분야별 전문 인력이 달려들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공공외교와 정무 업무가 서로 꼬여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lee@donga.com
#공공외교#북미관계#한반도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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