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아래서]〈18〉시아버님의 ‘호주머니’를 탐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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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현 작가
신이현 작가
“며느리에게. 이번 노엘에 너희가 우리와 함께 못 하는 것이 너무 아쉽구나. 이번 노엘 식사는 실비네 집에서 하기로 했다. 멧돼지 요리를 한다네. 노엘 저녁에 멧돼지는 처음이다. 너를 위한 노엘 선물 100유로, 12월 네 생일 선물 100유로, 이 금액을 네 계좌로 이체했다. 원하는 선물을 사기를 바란다. 메리 크리스마스. 시아버지로부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알자스 시아버지께서 세 개의 카드를 보내왔다. 나와 레돔, 그리고 손자에게. 세 사람에게 세 개의 카드를 보냈지만 내용은 전부 비슷했다. 함께 못 해서 아쉽고 선물 대신 계좌로 얼마를 송금했으니 원하는 선물을 사라는 것이었다. 손자에게는 매달 10유로씩 넣는 것까지 합해서 320유로가 들어갔다는 계좌 명세서까지 함께 보냈다.

“아버님은 참 대단하시다. 작년에 보낸 카드와 내용이 하나도 안 달라. 적어도 선물의 가격이 5퍼센트는 올라야 되는 거 아니야? 벌써 10년째 100유로에 동결되었어. 유로가 하락해서 사실은 선물값이 삭감된 거나 마찬가지야.”

시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돈을 쓰는 데 아주 정확했다. 모든 자식과 손자들에게 주는 선물의 가격이 동일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엔 깨끗이 결산해서 대차대조표까지 내어서 모두에게 발표를 했다. 가족선물로 돈을 주는 것은 성의가 없다며 좋아하지 않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계산하기가 힘들다며 현금 지불을 선호하게 되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과외의 물건이라도 보내면 그 비용이 얼마냐고 꼭 물었다.

“그냥 선물이니 받으셔도 됩니다.”

적어도 열 번은 이렇게 묻고 대답해야만 그냥 받았다.

“프랑스는 사회주의라는데, 그건 많이 번 사람이 적게 번 사람들이랑 나눠 쓰는 것을 기본으로 하잖아. 그러니까 아버님은 우리한테 돈 좀 더 써도 되는 거 아니야? 어려운 자식한테는 좀 더 주고 넉넉한 자식한테는 좀 덜 주고,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어야지 너무 빡빡하셔. 꽉 막혔어 진짜.”

나는 시아버지의 금전적 철두철미함에 곧잘 불평했다. 가난한 자식에게 더 주는 것은 부모의 권리라는 주장을 폈다. 시아버지는 어깨만 으쓱했다. 가족들뿐 아니라 친구들과 신년 파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구순이 가까운 마을 친구들이 모두가 비슷한 금액으로 나누어 파티에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갔다.

“이번 신년 파티엔 또 한 명이 줄었다. 2주 전까지만 해도 살아서 아페리티프를 준비해 오겠다고 했는데 신년을 못 보고 갔어. 아이고, 가슴이야…. 다음번은 내 차례겠지. 여자들만 남고 이제 남자는 나밖에 없다. 과부들만 일곱이다…. 나보고는 와인만 들고 오라고 하네. 음식은 과부들이 준비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죽은 친구가 가져오기로 한 아페리티프는 내가 준비하겠다고.”

신년을 앞두고 시아버지는 아들과 길게 통화를 했다. 올해만 해도 동네 친구들 두 명이 세상을 떠났다며 왜 남자들의 평균수명은 이토록 짧은지, 여자들은 다들 저렇게 건강한데 왜 시어머니 루시는 먼저 가버렸는지 모르겠다고 슬퍼했다.

“신이 주는 이 불공평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이겠지.”

시아버지가 우울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그가 신이라면 인간의 수명도 공정한 절차를 거친 뒤 정확하게 계산해서 평등하게 주었을 것이다. 이럴 때 좀 친절히 다독여 주면 좋으련만 며느리는 참 얄밉게 새해 인사를 한다.

“그렇게 매사 공정하기만 하다면 사는 재미가 있나요.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이 신의 선물이겠죠. 아버님 해피 뉴 이어! 올해도 건강하시고 내년 노엘에는 선물값 제발 좀 올려주세요!”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선물#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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