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77년 만에 세상에 나온 로맹 가리 첫 장편소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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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포도주/로맹 가리 지음·장소미 옮김/280쪽·1만3000원·마음산책

1956년 ‘하늘의 뿌리’로, 1976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으로 두 차례 공쿠르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1914∼1980)의 첫 장편 소설이다. 그가 23세 때 완성했으나 77년간 누런 원고 뭉치로만 보관되다 2014년에야 정식 출간된 이 작품은 로맹 가리의 ‘아이디어의 실험실’로 불린다.

어느 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 공동묘지 담을 넘은 튤립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허연 백골들의 모습을 보고 기겁한다. 인기척이라곤 없을 것 같은 이곳은 사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공간이었던 것. 시위대를 벌레 잡듯 으스러뜨리는 거인 경찰부터 몸을 파는 모녀, 적이지만 우정을 쌓은 독일군과 프랑스군 병사까지…. 튤립은 묘지를 모험(?)하며 산 사람들보다 더 적나라한 사자(死者)들의 군상을 목도하고, 이를 경쾌한 부조리극으로 풀어낸다. 로맹 가리는 “이 소설은 청춘부터 성숙한 시기까지 줄곧 나와 함께했다”고 회상했다. 이 책에 나오는 시체들의 사연들은 그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자신이 살던 메르몽 하숙집에서 관찰한 인간 군상을 자양분으로 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 쓰인 에피소드들을 ‘자기 앞의 생’ ‘유럽의 교육’ 같은 이후 작품에서 여러 차례 변주했고, 여기 쓴 문장을 그대로 재사용하기도 했다. 청년 로맹 가리의 재기발랄함과 거장 에밀 아자르의 문학적 토대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죽은 자들의 포도주#로맹 가리#하늘의 뿌리#자기 앞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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