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소영]송년을 위한 망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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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상황에서 선택한 것은 잊혀지지 않고 자꾸 떠오른다
기억하는 것이 되레 고통일수도
개인도, 조직도 새로워지려면 잊을 것은 잊어버리는 忘年을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바야흐로 망년회 철이다. 예전부터 망상, 망령, 망신 등 ‘망’으로 시작하는 말들이 대개가 안 좋은 뜻이라 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모임을 망년회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찾아보니 망년회(忘年會)는 일본식 표현으로 국립국어원에선 송년회(送年會)로 쓰길 권장하고 있다. 구글에서 검색하면 송년회는 대략 350만 건, 망년회는 87만 건이 나오니 망년회라는 표현이 점점 사라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여전히 망년회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한자 그대로 망년은 한 해를 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 해를 잊는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아니 왜 잊는 것일까? 사실 기억만큼이나 묘한 것이 망각이다. 몇 년 전 경험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는데 몇 분 전 들은 사람 이름은 깜박하거나, 원소주기율표는 달달 외우면서 매일 타는 버스 시간은 헷갈린다거나, 꼭꼭 숨겨둔 연애편지는 어디 있는지 잘 기억하면서 머리 위에 얹어둔 돋보기는 어디 두었는지 헤맨다거나, 기억만큼 망각 역시 불연속적이고 비단선적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망각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오감으로 접하는 모든 외부 자극은 뇌에 입력되어 다양한 종류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먼저 자극을 감지하자마자 불과 수백분의 1초 사이 지속되는 감각 기억과 수십 초 유지되는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이 있다. 작업 기억은 말 그대로 입력된 정보를 즉각 다른 용도에 활용할 수 있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 벨연구소의 조지 밀러 실험에서 이처럼 한 번에 붙잡을 수 있는 정보 수는 그가 마법의 숫자로 이름 붙인 7±2, 즉 7개 내외로 밝혀졌지만 2000년대 초 연구에서는 4, 5개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폰이 2007년 등장했으니 지금은 이보다 더 줄지 않았을지 싶다.

이런 단기 기억 중 일부만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단기 기억과 달리 장기 기억이 형성될 때는 뇌세포 사이에 새로운 회로가 만들어져 몇 주, 몇 년, 혹은 평생 기억이 지속되게 된다. 이 같은 장기 기억 전환을 관장하는 뇌 부위가 뇌의 양쪽 측두엽에 쌍으로 있는 해마다. 인공지능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 데미스 허사비스가 하버드대, MIT 등 유수 대학에서 연구원 생활을 할 적에 수행한 연구가 해마 손상이 경험을 기억하는 데 미치는 영향이었다.

해마는 장기 기억 외에 공간 인식 및 이동 기능과도 깊이 연관돼 있다. 알파고 개발에 앞서 허사비스가 인공 해마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것도 해마가 바로 기억과 공간 인지라는 인간 지능의 가장 심층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있게도 해마가 불확실한 상황의 의사결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한 예로 2016년 캐나다 토론토대 심리학과 세포생물학 연구진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분석 결과, 주어진 상황이 보상과 처벌을 같이 가져올 수 있는 갈등 상황에서 선택을 내릴 때 해마 앞부분이 활성화됨을 발견하였다.

망각, 즉 잊어버린다는 것은 장기 기억에 저장된 지식이나 정보를 불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애써 저장한 것을 쓰지 못한다는 점에서 망각은 분명 손실이지만, 저장한 모든 것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저주가 될 수 있다. 인지과학 연구에서 보고되거나 영화나 소설 속에 그려지는 소위 완전 기억 능력자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트라우마에 가까운 고통을 겪는 것으로 나온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가 매 순간 접하는 외부적 자극을 그대로 쌓아놓는다면 우리 뇌는 폭발할지도 모른다. 보다 의미 있고 새로운 경험이 장기 기억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덜 중요하고 오래된 경험들은 자리를 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제대로 하는 망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겠다.

지금 이 순간 지난 11개월을 되돌아보며 떠올리는 것들은 순간 스쳐가는 단기 기억이 아니라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 경험들일 텐데 그중에는 최근 연구가 시사하듯이 망설이고 고민했던 선택이 수반되었던 경우가 꽤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개인으로서도 조직으로서도 과감히 잊어야 할 것들이 분명 있다. 송년, 제대로 한 해를 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망년, 제대로 잊을 것을 잊어야 하리라.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망년회#송년회#망각#장기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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