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조총과 상인이 동아시아 근대화 이끌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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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과 장부/리보중 지음·이화승 옮김/448쪽·2만3000원·글항아리

17세기 명나라는 자생적인 군사 발전을 이뤄온 주변국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가 팔기군을 사열하는 모습. 글항아리 제공
17세기 명나라는 자생적인 군사 발전을 이뤄온 주변국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가 팔기군을 사열하는 모습. 글항아리 제공
중국 경제사 전문가로, 베이징대 석좌교수인 저자는 16세기 이후 세계의 근대화가 서양의 것이었다는 기존 인식에 반기를 든다. 식민지 개척으로 비서양 국가에 기술과 문화가 일방적으로 전파됐다는, 유럽 중심적 역사 기술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내재적 변화와 역동성에 주목한다. 그가 택한 ‘글로벌 히스토리’, 즉 지구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세계의 근대화는 서양과 비서양의 양방향 소통 과정이었다.

물론 근대화를 주도한 건 유럽이었다. 15세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아시아로 향하는 신항로 개척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원양 항해가 보편화됐고 이전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의 교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 간 경제가 긴밀해졌다.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는 식민지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오스만 제국은 동유럽과 소아시아 전역을 다스리며 경제 교류를 주도했다. 17세기 네덜란드 선원 하멜이 13년간 조선에 머문 일화는 유명하다.

단순히 항해술의 발달로만 근대화가 이뤄진 것은 아니다. 신무기 ‘조총’으로 대표되는 군사 혁명과 ‘장부’가 상징하는 상인 무역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송나라에서 화약이 발명됐지만 15세기 이후 서양과 비서양 간 군사기술의 우위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유럽에선 화문총의 목재 손잡이를 개조해 사격 시 개머리판을 어깨에 댈 수 있었다. 병사가 어깨 위에 무기를 올려놓고 발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총의 사정거리가 늘어나 정확도가 올라갔고 총신이 늘어 화약을 더 많이 장전할 수 있었다. 아시아의 근대화는 “국제무역과 폭력의 융합”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주식회사를 대표하는 문구는 ‘왼손에는 장부, 오른손에는 칼’이었다. 칼은 조총으로 대체할 수 있다.”

조총을 든 세력의 출현은 아시아 패권을 유지해 온 명나라엔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주변국들을 침략하는 대신 조공을 대가로 독립을 보장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명나라는 대외 확장 없이도 물자가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조공시스템은 종주국과 번속국이 서로 이득을 얻는 일종의 호혜관계였다.”

여기서 아시아 국가들의 잠재력이 발현된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을 통해 유입된 서양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군사 기술의 세계화에 합류했다. 특히 명나라는 유럽의 대포에 중국의 주조 기술을 결합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포를 만들었다. 태국, 미얀마에서도 제조 장인을 데려와 군사력을 키웠다. 군사적 긴장 관계도 증가했다. 동남아 국가들은 명, 청 교체기에 놓인 중국에 맞섰다. 서양 신문물을 수용한 일본은 옆 나라 조선을 침략했다. 폐쇄적이었던 조선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조선에 침입해 명군이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하자 명군의 무기를 본 조선 대신 유성룡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모양이 이상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은 조총의 필요성을 느꼈다.”

아시아 각국의 자생적인 군사혁명은 명나라 패권을 위협했다. 작은 주변국도 ‘천조’의 권위와 조공 시스템이라는 아시아 질서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자는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위기가 끊이지 않았고, 이 위기들이 갈수록 가중돼 멸망하고 말았다”고 분석한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조총과 장부#리보중#동아시아#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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