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트럼프의 ‘키즈 사랑’, 그 대가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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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올해 3월 20일 미국 백악관 집무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서 전투기 미사일 전함 등 각종 무기 사진들 위에 숫자가 적힌 패널을 꺼내 들었다.

“보세요. 30억 달러, 5억3300만 달러, 이거 당신에겐 껌값(peanuts)이죠. 더 늘렸어야죠. 8억8000만 달러, 6억4500만 달러, 60억 달러, 그건 호위함용이고. 8억8900만 달러, 6300만 달러, 그건 포병용이죠.”

트럼프 옆에 앉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민망한 표정으로 간간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트럼프는 사우디가 약속한 무기 구매 액수를 줄줄이 열거한 뒤 “이건 많은 일자리를 의미한다. 미국 내 일자리 4만 개…”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진짜 멋진 관계”라며 껄끄러웠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와 다르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리는 33세의 막강 실권자. 일찍부터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절친 관계를 맺고 지난해 5월 트럼프의 첫 해외 방문지로 사우디를 선택하게 만든 인물이다. 트럼프의 사우디 방문 이후 무함마드는 사촌형에게서 왕세자 자리를 빼앗고 왕자들을 대거 구금하는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굳혔다. 그의 무한질주는 결국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으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그제 “왕세자가 이 사건에 대해 알았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미국은 사우디의 변함없는 동반자(steadfast partner)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우디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는 의회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내 편이라면 일단 감싸고 보겠다는 태도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예측 불허의 트럼프라지만 한번 꽂힌 사람에겐 시종 애정을 쏟는 일관성은 새삼 놀랍기만 하다.

이런 트럼프를 보면서 누구보다 안도할 이가 김정은일 것이다. 트럼프가 사랑에 빠졌다는, 무함마드보다 한두 살 많은 또 다른 총아(寵兒)가 김정은이다. 11·6 중간선거가 끝난 뒤에도 트럼프는 여전히 김정은과 “매우 좋은 관계”라고 했다. 북한이 비밀 미사일기지를 운영하며 ‘큰 속임수(great deception)’를 쓰고 있다는 보도에도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보도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사우디 왕세자의 암살 배후설에 대한 대응과 다르지 않다.

트럼프의 한없는 관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려울 때 도와주면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협상가의 계산법일 것이다. 사우디 왕세자에게 거는 기대는 분명하다. 사우디가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4500억 달러 가운데 계약이 확정된 것은 145억 달러로 전체의 3%에 불과하다. 트럼프는 이제 ‘고마운 후원자’ 입장에서 미수금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우디처럼 석유 부국도, 지역 강국도 아닌 북한에 트럼프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트럼프의 관심은 이제 온통 2020년 대통령선거에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은 오바마를 비롯한 전임 행정부가 모두 실패했지만, 자신이 이뤄낸 위대한 외교적 성과가 될 터다. 북한을 중국 견제용 균형추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엄청난 돈이 드는 주한미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의 오랜 주장을 관철할 기회로 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트럼프의 너그러움이 마냥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은 2년 안에 완전한 비핵화를 완료하겠다는 로드맵을 들고 와야 하고, 트럼프의 정치 일정에 맞춰 비핵화 이벤트로 조응해줘야 한다. 세상사가 모두 그렇지만 국제정치에서 무조건적 사랑은 결코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트럼프#무함마드 빈 살만#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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