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이제 믿겠니? 에테르의 존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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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3일 화요일 흐림. 인디언 서머.
#296 Lily Chou-Chou ‘Arabesque’(2001년)
 
속설에 따르면 릴리 슈슈는 1980년 존 레넌이 죽은 날 태어났다.

‘천재. 라기보다는, 우주.’ ‘갇힌 사고의 개방.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 ‘그의 음악, 가시광선을 넘어 투명보다 깊은 영역에 도달.’ 팬들이 슈슈에게 바치는 찬사들이다.

슈슈는 사실 2001년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시이나 링고(린고), 뷔욕(비외르크), 비틀스에 비견되는 신비로운 천재.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에테르의 구현자.’

옛날 사람들은 우주의 공허를 믿지 못했다. 어둠의 공백을 실은 에테르라는 물질이 가득 채우고 있으리라 추정했다. 주인공 유이치가 논 한가운데 허수아비처럼 외따로 박혀 서서 커다란 헤드폰으로 슈슈의 음악을 듣는 영화의 첫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얼마 전 일본 도쿄에 갔다가 인디언 서머를 만났다. 가을에 잠시 찾아오는 기만적인 여름 날씨. 사나운 태풍이 밤을 휘저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낮 최고기온은 전날보다 무려 10도나 오른 섭씨 29도를 기록했다.

초현실적으로 맹렬한 아침 햇살에 눈을 떠 거리에 나섰다. 꼭 가을에 촬영하는 여름 영화 세트장 안에 잘못 들어온 듯했다. 나는 이상한 꿈의 주인공. 반팔 차림의 사람들은 엑스트라가 돼 곁을 스쳐 지났다.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 탓에 몇 개의 전철 레일이 복구 중이라는 일본어 안내문이 보였다. 사람들을 위해 ‘죄송합니다!’, 평생 길가에 비켜서 준 나무가 마지막 순간에 인간들의 삶 가운데를 향해 직각으로 드러누워 버린 일에 대해 생각했다.

교외선을 타고 후타코타마가와역에 내렸다. 초록색 풀로 덮인 푸른 강변을 걸으며 멀리 후타코교(橋)에 멈춰 선 전철을 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슈슈의 ‘Arabesque’를 재생했다. 어쩌면 이게 첫 장면이 될지도 모르니까. 허공은 온통 슈슈의 음성으로 채워졌다. 세계는 초점을 잃고 비틀댔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이제 믿겠니. 에테르의 존재.”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릴리 슈슈#에테르#arabes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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