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비핵화 엉클어뜨리는 햇볕정책 욕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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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이기홍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의 요즘 행보를 국제사회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많을 것이다. 비핵화의 결정적 고비인데 북한을 견인할 유일한 수단인 대북 제재 완화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문 대통령이 유럽 순방에서 대북 제재 완화 협조를 요구한 것은 북핵 문제 접근법의 전환 의지를 공식화한 사건이다.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단계에 온다면”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방점이 거기에 있었다면 꺼낼 필요도 없는 공자님 말씀이었다. 강조하고 싶은 포인트는 제재 완화였을텐데 이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의 “우리 스스로 새로운 조건과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5·24 조치 해제 검토 발언,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 결정으로 이어져온 행보에 깔린 의중을 분명히 드러낸 결정판이다.

그것은 바로 국가관계의 기본 접근법인 ‘연계(linkage) 원칙’으로부터 이탈하겠다는 선언이다. 연계 원칙은 상대국이 호의적 행동을 보이면 보상하고 악의적 행동을 보이면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압박은 버리고 선물에 집중할 의향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이는 핵심 청중, 즉 김정은을 겨냥한 립서비스로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당신을 대변해주고 있으니 경계심을 풀라는 메시지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집권 후 1년 넘게 억눌러온 햇볕정책 DNA의 분출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이어 ‘햇볕정책 버전 스리(3)’를 본격화하고 싶은 것이다. 엄존하는 대북제재 시스템 내에서만 운신해야 했던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 진전이 비핵화를 촉진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국제 제재라는 맨홀 뚜껑을 돌파하려 하고 있다.

여기엔 김정은은 확고한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지만 초식동물처럼 경계하는 나머지 실행을 주저하고 있으므로 제재를 완화해 안심시키고 지원해주면 비핵화 실행에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부정확하다. 첫째, 북한이 핵 포기 후 미국이 적대적으로 표변할까 봐 걱정돼 비핵화를 머뭇댄다는 가정 자체가 근거 없다. 흔히들 그런 논리의 근거로 이라크 사담 후세인 대통령과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최후를 예로 드는데, 이는 피상적인 관찰이다.

카다피는 2003년 말 핵 포기 이후 7년 여 지나 발발한 민주화 혁명 때 양민과 반군을 무차별 학살하다가 유럽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에 의해 제압된 것이지 미국이 표변해서 최후를 맞은 게 아니었다. 후세인은 지역 패권주의적 성향이 강해 세계 석유공급의 중심인 주변국들에 대해 끊임없는 침탈을 해 미국 주도로 방대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야 했고, 이를 유지하는데 매일 천문학적인 비용과 인력이 소요되는 등 미국에겐 십 수년간 참기 힘든 골칫덩이였다. 그런 갈등이 곪고 곯다가 결국 명분 없는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진 것이다.

반면 북한의 경우는 핵을 포기하고 남북간에 군사적 신뢰관계가 구축돼 한국 일본에 대한 도발 위협이 없어지면 미국이 적대적으로 대할 이유가 없다. 노동당 중앙위 소속 핵심 두뇌 수천 명이 대미 전략을 짜는 북한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따라서 김정은이 비핵화 실행에 나서지 않는 것은 신뢰구축이 충분치 않아서가 아니라 핵 포기 결단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게 타당하다.

남북관계를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진전시켜 비핵화를 촉진한다는 논리도 틀렸다. 비핵화가 안 된 상태에서는 남북관계 진전이 불가역적인 위치에 오를 수 없다. 핵 협상이 깨져 북한이 다시 핵·미사일 도발을 하면 제재는 더 강경해지고 남북경협 마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를 통한 중재자 역할은 효용이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물론 집권세력 내부에서도 햇볕을 수단으로 완전한 비핵화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은 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남북관계 가속 페달을 밟는 바탕에는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남북간 평화교류, 군사적 신뢰구축이 이뤄진다면 그게 비핵화를 놓고 살벌한 대립구도를 이어가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위험한 생각의 근원에는 같은 민족, 동족인데…라는 신앙 같은 이데올로기가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좌파운동권 진영의 숙원, 즉 냉전체제를 해체해 분단모순을 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설령 다행히 김정은이 진심으로 비핵화 의지를 확고히 갖고 있다 해도 달래고 투정받아 주는 접근법을 쓰면 김정은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 즉 ‘주동적 비핵화’를 고집할 것이다. 그것은 아주 멀고 까다로운 우회로이며 곳곳에 난파 위험이 널린 코스가 될 것이다.

현실정치는 상대방의 말이나 인상이 아니라 행동, 상대가 처한 객관적 조건을 봐야 한다. 2001년 3월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김정일과 만났을 때 받은 인상을 전하며 “김정일은 식견이 있는 지도자”라고 칭찬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자기 국민을 굶어죽게 만드는 김정일이 어떻게 정치지도자라 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두 견해 중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웠는지는 그 후의 역사가 말해준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북한 비핵화#햇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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