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의 위기, 모든 계층 감싸는 영국식 보수주의로 극복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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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가 말하는 보수주의

지난달 정년퇴임한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출간한 ‘제국의 품격’을 들고 1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 건물 옥상에 섰다. 박 교수는 “우리 근대사와 같은 비극을 겪은 나라가 아일랜드 폴란드 노르웨이 등 적지 않다. 어느 민족이건 흥망성쇠를 겪는다”며 “역사에 대해 너무 자기 연민적 시각을 갖는 건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지난달 정년퇴임한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출간한 ‘제국의 품격’을 들고 1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 건물 옥상에 섰다. 박 교수는 “우리 근대사와 같은 비극을 겪은 나라가 아일랜드 폴란드 노르웨이 등 적지 않다. 어느 민족이건 흥망성쇠를 겪는다”며 “역사에 대해 너무 자기 연민적 시각을 갖는 건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국내 대표적 영국사 연구자인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65)의 연구실 서가는 듬성듬성 이가 빠진 듯했다. 40여 년의 연구 생활을 마치고 지난달 정년퇴임한 박 교수는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대표적 보수 성향 지식인인 그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18일 만났다. 》
 
“보수주의의 핵심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일한 만큼 보상받고, 공동체를 위해 애쓰며 너무 개인주의로 빠져들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수월성(秀越性)의 대가를 인정해주면 전체의 몫이 커지죠. 그러면서 못하는 사람을 감싸 안는 겁니다. 우리나라 보수정당은 바로 감싸 안는 데서 많이 모자라요.”

6월 지방선거에서 보수 야당이 궤멸에 가까운 성적표를 낸 뒤 100일가량이 흘렀다. 지난해 ‘정당의 생명력: 영국 보수당’(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을 출간한 박 교수는 자연스럽게 ‘한국 보수의 위기’ 이야기를 꺼냈다. 영국 보수당이 200년 가깝게 당명을 유지하며 꾸준히 국민의 선택을 받아 온 힘은 무엇일까. 박 교수는 “쉽다. ‘노동당은 노동계급만의 정당이지만 보수당은 모두의 정당’이라고 내세운다. 그게 오늘날까지도 호소력을 갖는다”고 말했다.

“19세기 후반 영국 노동계급은 상층부부터 참정권을 갖기 시작했어요. 당시 보수당의 리더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가 노동자들을 보수주의로 끌어들입니다. 열심히 일한 이에게 보상하는 사회를 만들고, 애국심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준 거예요. 이게 디즈레일리 이후 150년 동안 보수당의 일관된 전략입니다. 한데 우리나라 보수당은 기득권과 엘리트 계층만 대표하는 것처럼 돼 있죠? 그러면 안 됩니다.”

박 교수는 좌파 정당이 계층 등으로 국민을 분리하고 약자를 위한 정부를 표방한다면, 보수당은 모든 사람을 아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느 계층이든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

19세기 초 영국 버밍엄 기술자, 학자들의 모임 ‘루나 소사이어티’의 멤버를 형상화한 동상. 21세기북스 제공
19세기 초 영국 버밍엄 기술자, 학자들의 모임 ‘루나 소사이어티’의 멤버를 형상화한 동상. 21세기북스 제공
최근 박 교수는 자신의 영국사 연구를 응축한 ‘제국의 품격’(21세기북스·2만5000원)을 냈다. 부제는 ‘작은 섬나라 영국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부제목이 너무 ‘제국주의적’이라고 농담을 건네자 “출판사에서 단 제목인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며 “강조하고픈 건 영국이 근대적 제도의 기반을 닦고 산업혁명을 일으킨 과정”이라고 말했다.

책은 먼저 근대 영국이 만든 법과 제도를 강조한다. 영국은 개인의 재산권을 확립하고 보장하면서 제임스 와트(1736∼1819) 같은 이들이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를 출원해 경제적으로 보상받는 구조를 잘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술자들의 등장에는 측정과 관찰, 경험적 증거를 중시하는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과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사고의 장을 연 개신교 정신이 배경에 깔려 있다.

박 교수는 “영국인들은 지식과 과학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것이라는 데 공감했다”며 “과학자와 기술자가 사회적 신분을 건너뛰어 동아리를 만들어 함께 실험하고 토론하는 독특한 문화가 영국에는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 중 사회 발전에 있어서 엘리트 리더십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대중의 잠재력이 있어도 허무하게 스러진 것이 굉장히 많아요. 영국에서 1830, 40년대 노동자들이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인민헌장’ 운동에도 수백만 명이 참여했지만 제대로 규합하고 이끄는 지도자가 없어 결국 실패했지요.”

보수적 역사 인식을 설파하는 박 교수지만 유학시절만 해도 좌파에 가까웠다. 그는 1978년부터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에서 저명 보수주의 학자인 버나드 세멀 교수(1928∼2008) 아래서 공부했다.

“당시에는 교수님이 가르치는 것마다 모두 마음에 안 들었지요. 논문 자료 수집차 영국에 갔다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에릭 홉스봄 교수(1917∼2012)를 만나 노동사 연구에 푹 빠졌습니다. 홉스봄 교수는 돌아가실 때까지 영국 공산당을 떠나지 않고 좌파 정치활동을 했지만 저작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도식적으로 적용하지 않았어요.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박 교수는 거대 담론과 도식으로 역사를 보는 것에 회의적이다. 역사 연구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찾아내는 게 1차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근대는 ‘자유’를 매개로, 목표로 하는 제도입니다. 대부분 영국에서 생겨나 퍼져나갔습니다. 수많은 영국의 ‘최초’들이 어떤 상황에서 가능했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박지향#서울대 명예교수#영국사#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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