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과잉에 美수출까지 막혀… 앞길 캄캄한 한국 철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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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조업 골든타임 지켜라]8대 주력산업 점검<7>철강

“중국이 작심하고 물량을 다시 전 세계로 밀어내기 시작하면 한국은 포스코, 현대제철 정도 빼고는 버틸 길이 없어요.” 28일 만난 한 중견 철강업체 관계자의 목소리는 타들어갔다. 앞서 통화한 다른 철강업체 관계자는 공장 라인 일부를 멈췄다고 했다. 강관(파이프)을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업체였다. 미국의 철강수입 제한조치로 하반기(7∼12월) 수출길이 막힌 것이다. “지난해부터 100여 명 잘랐다. 공장이 안 돌아가는데 인력을 유지할 순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 철강업계가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국내 주요 철강사 22곳 중 포스코를 제외한 나머지 21곳의 상반기 평균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0%나 줄었다.

○ 해외선 美中 압박, 국내선 생존경쟁

위기의 가장 큰 배경으로는 중국의 공급과잉이 지목된다. 2000∼2010년 사이 세계 철강 생산은 연평균 5%씩 늘었는데 중국은 13∼15%씩 늘었다. 값싼 노동력과 대규모 생산능력을 무기로 ‘저가 철강’을 해외로 밀어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세계 철강 공급과잉 물량은 2013년 6억1500만 t에서 2016년 7억8600만 t으로 늘었다. 한국 연간 소비량(약 5600만 t)의 약 14배다.

한국 내수시장에서도 2010∼2013년 사이 10% 후반대였던 중국산 철강 점유율이 2014년에는 24%를 넘어섰다. 지난해는 20%로 다소 하락했지만 여전히 위협적이다.

세계적인 공급과잉이 철강 위기로 이어지자 중국은 2013년경부터 정부 차원에서 제동을 걸며 생산 감축을 추진했다. 2000년대 매년 상승곡선을 그리던 중국의 철강 생산량도 2014년 8억2231만 t을 정점으로 조금 하락했다. 중국산에 시장을 내주며 공장 가동을 줄여야 했던 세계 철강사들은 정상화를 기대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철강설비 가동률은 68.7%로 2008년(80.3%)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철강업체 관계자는 “공급과잉 당시 망가졌던 시장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내수경기가 둔화될 조짐이 보이자 철강업계는 다시 긴장하고 있다. 중국이 경기침체 탓에 내부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물량을 다시 해외로 밀어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중국의 과잉공급은 세계 철강업계에서 시한폭탄 같은 문제”라고 말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유정용 강관을 주로 생산하는 중견업체 넥스틸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발동한 수입제한 조치로 대미(對美) 수출 물량이 지난해의 절반으로 줄었다. 이 회사는 수출의 90%를 미국에 의존해 왔다. 넥스틸 관계자는 “공장 가동률은 전성기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고 생산인력을 교육 등에 투입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는 포항의 생산라인 일부를 미국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현재 미국 내 부지 선정 작업을 진행 중이다.

코너에 몰리면서 국내 철강사들 간에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중견·중소 철강사들은 지난해 말부터 포스코 등 대형 철강사에 “열연 공급가를 낮춰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가뜩이나 내수 부진으로 판매가 저조한데 원재료 가격 부담까지 높아 중소 철강사들은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는 이유다. 한 중견 철강사 관계자는 “아무리 동종업계 경쟁 관계지만 위기 때는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대형 철강사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엄연히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상 가격이 있는데 자신들에게만 싸게 달라는 것은 특혜 요구”라고 반박했다. 그는 “설령 그렇게 해줘도 나중에 불공정거래 시비가 일거나 미국 등 다른 수출 대상국들이 항의성 보복 조치를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 혁신 속도에서도 앞서나가는 중국

이런 가운데 ‘혁신’ 속도에서도 한국은 중국에 뒤처지고 있다. 지난해 중국 최대 철강사 바오우강철 회장에 취임한 마궈창은 기존 철강업계에 없었던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철강, 금융, 온라인 플랫폼을 결합시킨 것이다. 바오우는 우선 온라인 철강거래 플랫폼 ‘어우예윈상(歐冶云商·Ouyeel)’을 만들었다. 누구나 여기서 철강 제품을 사고팔 수 있다. 이어 어우예윈상 이용자들에게 대출과 유사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자도 받았다.

국내 철강사 관계자는 “바오우는 전 세계 고객사의 금융 및 구매 제품 관련 빅데이터를 수집해 자신들의 제품 생산, 연구개발(R&D), 판매에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자수익은 R&D에 투자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런 형태의 융합산업은 등장할 수 없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금산분리 때문이다. 포스코경영연구소는 어우예윈상의 온라인 거래 규모가 앞으로 연간 2억 t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2억 t이면 한국의 4년 치 철강 내수소비량과 맞먹는다. 한 철강업체 관계자는 “한국이 기껏해야 더 좋은 철강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수준이라면 중국은 아예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고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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