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시한부 판정 후 9년… 그 ‘찬란한’ 삶의 투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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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오기 전에/사이먼 피츠모리스 지음·정성민 옮김/216쪽·1만2000원·흐름출판

아일랜드 영화감독인 저자, 갑작스럽게 희귀병 발병
生에 대한 순수한 욕망으로 ‘온몸을 불사르며’ 견뎌낸 삶과 고통의 순간 기록

영화감독 사이먼 피츠모리스가 병마와 싸우면서 만든 동명의 다큐멘터리 ‘It‘s Not Yet Dark’(2017년 개봉)의 한 장면. 바다를 바라보는 사이먼과 아내 루스의 뒷모습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 처연할지언정, 그들은 사랑하고 또 사랑했기에. 흐름출판 제공
영화감독 사이먼 피츠모리스가 병마와 싸우면서 만든 동명의 다큐멘터리 ‘It‘s Not Yet Dark’(2017년 개봉)의 한 장면. 바다를 바라보는 사이먼과 아내 루스의 뒷모습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 처연할지언정, 그들은 사랑하고 또 사랑했기에. 흐름출판 제공
“여동생 케이트가 결혼을 한다. 지금까지 본 결혼식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이다. 나는 발을 똑바로 지탱하기 위해 양말 안에 보조기를 찬다. 축하연 이틀째 되는 날, 문자메시지가 온다. ‘세상 소식들’이 벨파스트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다. 나는 춤을 춘다. 내 인생의 마지막 춤이다.”

어쩌면 지루하거나 불편할 수 있다. 그만큼 삶의 끝자락에 선 이들이 남긴 책은 꽤나 많다. 때론 과한 감정이 버겁고, 혹은 덩달아 가슴을 짓눌리는 걸 피하고도 싶다. ‘어둠이…’ 역시 똑 닮은 체험이 될지도. 하지만 최소한, 이 책은 ‘찬란하다’.

사이먼 피츠모리스는 병을 앓기 전 히말라야 산행에 나서 영화를 찍을 정도로 건강하고 열정적인 예술가였다. 흐름출판 제공·ⓒTHE IRISH TIMES
사이먼 피츠모리스는 병을 앓기 전 히말라야 산행에 나서 영화를 찍을 정도로 건강하고 열정적인 예술가였다. 흐름출판 제공·ⓒTHE IRISH TIMES
아일랜드 영화감독인 저자는 1973년생. 히말라야 산행을 다녀올 정도로 정력적이던 그는 2008년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겨우 35세에 3, 4년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까지. 당연한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와 아내 루스는 망설이진 않았다. 더 삶을 아름답게 가꾸자고. 더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진 사실, 기시감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남은 생’을 잘 지내자는 게 아니었다. 남과 똑같이, 아니 더 근사하게 살리라 맘먹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여행도 가고, 아이(심지어 쌍둥이)도 더 가졌다. 그리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0년경. 저자는 큰 위기를 겪는다. 폐렴으로 호흡 곤란에 빠졌다. 의료진조차 ‘마지막’을 언급하며 인공호흡기를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단호했다. 어떤 장치를 달고서라도 버티려 한다. 그게 자신의 순수한 욕망이니까. 사랑하는 이들 곁에 1분 1초라도 더 머물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저자가 말년에 찍은 가족사진. 아내 루스와 다섯 아이를 낳았다. 잭과 라이피를 키우다 루게릭병 판정을 받았을 때 루스는 셋째 아덴을 임신한 상태였다. 막내 쌍둥이 세이디와 헌터는 저자가 인공호흡기를 달고 거의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가졌다. 부부는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흐름출판 제공·ⓒ Marc Atkins
저자가 말년에 찍은 가족사진. 아내 루스와 다섯 아이를 낳았다. 잭과 라이피를 키우다 루게릭병 판정을 받았을 때 루스는 셋째 아덴을 임신한 상태였다. 막내 쌍둥이 세이디와 헌터는 저자가 인공호흡기를 달고 거의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가졌다. 부부는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흐름출판 제공·ⓒ Marc Atkins
“나는 살고 싶다. 그게 잘못된 일인가? 무엇이 인생에 의미를 주는가? 의미 있는 삶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 나는 살아있다. 그것도 순간의 착오 때문에. 그들은 내게 삶을 주었고, 나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큰 매력은 문장이다. 간결하고, 담박하다. 부질없는 미사여구는 걷어내고, 적확한 단어만 골라낸다. 실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란 생각도 들긴 했다. 온몸이 마비된 뒤, 눈동자 움직임으로 글을 쓰는 ‘아이 게이즈(eye-gaze) 컴퓨터’로 작업했으니. 물론 그게 글이 지닌 품격을 흠집 내진 않지만.

저자는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판정보다 5, 6년을 더 산 셈이다. 하지만 감히 추측건대, 그는 만족하지 않았으리라.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을 테다. 그런 자신과 아내, 가족을 자랑스러워했을 게다. “나는 온몸을 불사르며 이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죽음과 싸우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삶과 싸웠다. 원제 ‘It‘s Not Yet Dark(아직 어둡지 않다)’가 더 맞춤한 이유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둠이 오기 전에#사이먼 피츠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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