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붉은 깃발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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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운전자의 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을,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전방 50m 앞에서 걸어가며 말을 끄는 마부나 행인에게 위험을 알려야 했다. 증기기관을 발명한 영국에서 1865년 만들어진 ‘붉은 깃발 법’의 내용이다. 이 법의 진짜 문제는 조수의 걸음보다 느린 자동차 최고 속도였다. 그 속도는 시내에서는 시속 2마일(약 3.2km), 교외에서는 시속 4마일(약 6.4km)로 제한됐다. 19세기 말까지 최고 속도가 시속 12마일(약 20.2km)로 늘어나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자동차산업의 주도권이 다른 나라로 넘어가버린 다음이었다.

▷한국인은 페이스북의 성공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페이스북이 미국에서 선보인 소셜미디어 개념의 서비스를 한국인은 페이스북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전에 이미 싸이월드를 통해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브스쿨 열풍이 불어 불륜을 조장한다는 비난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럼에도 싸이월드가 페이스북 앞에서 맥을 못 춘 것은 인터넷실명제라는 규제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한국인의 근대 경험에서 공백 중 하나가 수표에 대한 경험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자기 명의 수표를 써본 적이 없다. 고작 써본 것이라곤 은행의 자기앞수표다. 서구에서는 지금도 자기 명의로 사인한 수표를 많이 쓴다. 우리는 신용결제에서 수표를 건너뛰어 더 편리한 신용카드로 넘어왔다. 하지만 어느샌가 다시 기존 결제시스템 중심의 금융 규제가 질곡이 돼 핀테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 인터넷전문은행의 진입장벽 완화를 강조하며 ‘붉은 깃발 법’을 거론했다.

▷정부마다 규제개혁 정책의 상징이 하나씩 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전봇대였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손톱 밑 가시였다. 그럼에도 전봇대도, 손톱 밑 가시도 제대로 뽑혔다고 할 수 없다. 이번에는 붉은 깃발을 뽑아낼 수 있을까. 어느 시대나 규제개혁은 쉽지 않은 듯하다. 이 주의 붉은 깃발, 혹은 이달의 붉은 깃발, 혹은 올해의 붉은 깃발을 선정해 퇴치하는 지속적인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붉은 깃발#페이스북#싸이월드#핀테크#규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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