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종수]정치는 과연 허업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31일 03시 00분


코멘트

정치는 역사의 위대한 가르침 지키고 현실을 바꿀 엄청난 권력을 부여받아
편 가르기로 진영의 노예 양산하거나 권력을 약탈 기회로 삼는 자에겐 허업
절제, 희생 없이 희망 남기기 어려워

이종수 객원논설위원·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이종수 객원논설위원·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21세기에도 기적은 있다. 겨울에는 잿빛 눈이 내리고, 여름에는 살인적 폭염이 쏟아지며, 사람들이 서로 칼을 품은 듯 살아가는 서울에서도 기적은 일어난다. 그 기적으로 우리는 희망을 품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작년 8월 24일 연구실로 생면부지의 노인이 찾아왔다. 그분은 ‘동아광장’의 글을 읽었다며 한국의 청년들이 안중근의 얼을 기억하게 하는 데 써주기 바란다며 1억 원을 내놓았다. 지금은 은퇴를 해서 이 돈밖에 없지만 앞으로 또 힘을 모아볼 테니 노력해 보자는 말씀도 덧붙였다. 바로 그 전주에 유족에게 집을 드리고 싶다는 분이 나타난 직후여서 나는 어리둥절했고 이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였다.

속수무책이던 사료 수집과 세미나에 숨통이 트였고, 기부자의 뜻에 따라 청년들을 모아 안중근의 희생과 인간애 그리고 평화사상을 나눌 길이 열렸다. 청년들을 모으는 공고를 한 달 한 후 학생과 교수 11명을 선발했다. 이들과 함께 지난주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청사와 뤼순(旅順) 감옥을 탐방하고 돌아왔다.

임시정부 청사는 한 해 15만 명,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 감옥은 3만 명의 한국인이 찾아온다고 했다. 이 중 상당수는 청년들이다. 보잘것없는 작은 건물 한 채, 어두컴컴한 감옥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숙연한 가운데 뿌듯했다. 한국사회가 고비 고비 힘든 과정을 거치긴 해도, 이 나라가 결코 간단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에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흘렀다.

뤼순 감옥은 아직도 죽음의 기운이 스산하다. 고문과 협박, 살육이 쉴 새 없이 자행되던 곳에 한국인은 300명 정도 수감되어 있었다. 수감 기간 중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방에 가두거나 급식을 굶어 죽을 수준으로 줄였다. 겨울에 이불을 제공하지 않아 얼마나 추웠던지, 수감되어 있던 신채호 선생은 부인에게 솜이불 하나 넣어줄 것을 부탁했다. 부인 박자혜 여사는 그것을 구입할 돈이 없어 솜이불을 넣어주지 못했다.

사형을 언도받은 안중근에게 조국이나 천주교는 힘이 없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그의 의거를 국내 신문들은 보도조차 하지 못했으며, 죽음을 앞둔 신앙인으로 마지막 종부성사(終傅聖事)를 집전할 신부를 보내 달라는 안중근의 청을 서울의 뮈텔 주교는 거절했다. 안 의사가 붓글씨로 써준 유묵과 그에 대한 이야기들도 대부분 일본인에 의해 전해진 것들이다. 그 칠흑 속에서 31세 청년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불안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을 이긴 인물이었기에 사형이 집행되던 날 감옥 소장 구리하라는 자신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에게 ‘오늘은 큰 인물이 사형을 당하는 날이니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다.

귀국하자마자 우리는 노회찬 의원의 투신사망 소식을 접했다. 여기에 김경수 경남지사는 ‘정치가 허망하다’고 페이스북에 썼고, 이틀 뒤 세상을 떠난 정미홍 전 대한애국당 사무총장은 ‘부질없는 일’이었다고 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타계한 김종필 전 총재가 ‘정치는 허업’이라 했다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소식들이었다.

정치는 과연 허업(虛業)일까? 역사의 위대한 가르침을 지키고 그것을 웅변함으로써 박수를 받으며 현실을 바꿀 엄청난 권력을 부여받는 게 정치 아닌가. 그 경계조차 불분명한 진보와 보수로 편 가르기를 일삼아 자기 진영의 노예들을 양산하거나 권력을 쥐면 약탈의 기회로 삼는 자들에게 정치는 허업으로 귀결된다. 중국에서 열리는 안중근 추념식까지 와서 40분간 자기 홍보영상이나 찍다가, 주최 측이 어렵게 만들어 선물한 안 의사 흉상 기념품을 길거리에 버리고 가는 정치인들도 허업에 골몰하는 사람들이다. 자기절제와 희생 없이 어려운 민초들에게 정치가 희망을 남기기는 어렵다. 그것을 위한 첫째 덕목은 절제이고, 더 큰 덕목이 있다면 자기희생이다. 목숨을 바쳐 후손들에게 희망을 남긴 안 의사나 그 이야기를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어 노후자금을 들고 온 노신사는 허업이라는 말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지 않을 듯하다.
 
이종수 객원논설위원·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안중근 의사#뤼순 감옥#정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