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의 미술시간]<15>권력 다툼의 희생양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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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들라로슈 ‘제인 그레이의 처형’. 1833년.
폴 들라로슈 ‘제인 그레이의 처형’. 1833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눈을 가린 채 앞쪽으로 손을 뻗고 있다. 자신의 머리를 내려놓을 단두대를 찾기 위해서다. 검은 털 코트를 입은 남자가 도와주고 있고, 왼쪽의 두 여인은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사형집행인의 도끼에 목이 잘려 하얀 드레스는 곧 핏빛으로 물들 것이다. 도대체 이 소녀는 누구고,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을까?

그림 속 주인공은 9일 만에 폐위된 영국 여왕 제인 그레이다. 1553년 제인은 성공회 신도였던 시아버지 존 더들리와 친부모의 야욕 때문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략결혼에 이어 여왕까지 됐다. 하지만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가톨릭계 여왕 메리 1세에 의해 9일 만에 폐위됐다. 제인은 어릴 때부터 영민했고, 학문을 즐겼으며 정치에는 전혀 관심 없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메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인을 죽이지 않고 런던탑에 유폐시켰다. 하지만 제인의 아버지가 반란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인은 다시 위험인물로 간주돼 단두대에 올랐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주겠다는 메리 1세의 회유도 뿌리치고 그녀는 결국 단두대에서의 당당한 죽음을 선택했다. 그녀 나이 겨우 열일곱이었다.

약 300년 후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는 이 사건을 화폭에 옮겼다. 처형되기 바로 직전, 여왕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이 그림은 1834년 파리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비슷한 역사를 공유한 프랑스인들이 공감할 만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들라로슈는 역사적인 주제를 상상력을 동원해 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능했다. 실제 처형은 야외 공개처형장에서 집행됐지만 여기선 런던탑 내부로 그려졌다. 또 빛을 받은 여왕의 흰 피부와 드레스는 처형장 바닥에 깔린 검은 천과 강한 대비를 이뤄 그녀의 결백과 억울한 희생을 강조하고 있다. 권력 다툼의 끝은 언제나 피를 부르듯, 제인 역시 어른들의 권력욕이 낳은 희생양이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폴 들라로슈#제인 그레이의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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