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회담서 한국 독립 첫 약속, 얄타선 냉전 분위기 조성되기 시작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국 현대사에 의미 있었던 정상회담 장소
샌프란시스코서 韓蘇 수교 첫 단추… 최근 들어 판문점도 국제적 관심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주요 강대국 회담도 한반도가 아닌 ‘제3국’에서 열렸다. 1943년 11월과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화민국 3국 간 카이로 회담은 일본이 패전한 뒤에는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을 선언했다. 당시 참가한 정상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총통 등 3명이다.

카이로가 회담 장소로 선정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반기 미영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을 밀어내고 승리한 것과 관련이 있다. 유영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전시 때 중요한 회담은 전선에서 너무 멀어서도 안 되며 동시에 승리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1945년 2월 크림반도 얄타에서 열린 루스벨트 대통령, 처칠 총리,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등이 참석한 얄타 회담에선 미소 간 한반도 분할 점령이 합의돼 분단의 씨앗을 뿌렸다.

얄타 회담은 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을 향해 총공세를 펼치며 독일로 진군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많다. 스탈린이 자국의 통제력이 있는 지역을 강력히 희망한 것도 얄타가 장소로 선정된 이유로 꼽힌다. 스탈린이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루스벨트를 배려해 기후가 온화한 휴양지 얄타를 골랐다는 해석도 있다.

올해 6월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지구촌 마지막 냉전 지대인 한반도의 분단 구조를 해체하는 단초가 될지 주목된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1980년대 이후에는 한국이 직접 참여하거나 주도한 정상회담이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소련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노 전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은 페어먼트 호텔에서 만나 환하게 웃었다. 이날 회담 이후 그해 9월 한국은 소련과 수교해 북방외교의 돌파구를 마련했고 2년 후 중국과 수교하는 징검다리가 됐다.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은 ‘햇볕 정책’을 널리 알리면서 세계의 이목을 끄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회담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카이로회담#정상회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