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등 중립국 성향 많아… 정치-경제적 파급효과도 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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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제3국 정상회담’의 지정학


16일 북유럽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처음으로 만난다. 이번 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러시아와의 내통’ 의혹을 받아 특별검사의 조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이뤄지는 데다 한반도 비핵화도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북-미 싱가포르 회담 이후 또 하나의 빅 이벤트를 왜 제3국에서 열까. 이유와 배경은 달랐지만 과거에도 주요국 정상회담이 제3국에서 열린 사례가 적지 않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했다.

○ ‘헬싱키, 미-러 고민 때 여러 차례 만난 곳’

미-러가 헬싱키를 ‘제3국 정상회담’ 장소로 선택한 것은 여러 차례 있었다. 1975년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곳에서 ‘냉전을 녹인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를 받는 ‘헬싱키 협약’을 만들어냈다.

포드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설정된 유럽의 국경선을 인정하는 대신 소련에 인간 이동의 자유, 사상의 자유, 정치수용소 폐지, 이산가족 재회 등 몇 가지 인권 조항을 인정하도록 했다.

협약 체결 후 미국 내에서는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보다 많은 실리를 챙겼다며 포드 대통령이 실패한 회담을 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두 정상도 이 협약의 ‘인권 조항’이 1990년대 초 동구권의 ‘탈소련’ 도미노가 이어질 때 진가를 발휘할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소련의 개입과 강제 진압을 막는 견제 장치로 작용하면서 냉전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됐다.

1990년 조지 부시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헬싱키에서 만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쿠웨이트 침공 사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1997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구소련 국가들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문제를 다뤘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헬싱키는 미-러 양국 간 주요 현안을 해결하는 역사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정상회담 장소로 적합하다”고 전했다.

핀란드가 미-러 양국의 제3국 정상회담 장소로 여러 차례 선택된 것은 양측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핀란드의 ‘중간국 중립국 외교’도 한 요인이다. 핀란드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이자 유럽의 단일 화폐 유로를 사용하는 등 ‘서방 클럽’에 속하면서도 나토에는 참여하지 않아 러시아도 거부감이 없다. 러시아는 19세기 핀란드를 자국 영토에 편입하고 2차대전 당시 침공하는 등 양국 간에는 역사적 감정이 남아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핀란드는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이 위기 탈출에 큰 버팀목이 되는 등 양국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정치적 중립, 개최국 정치적 안정은 기본’

지구촌에는 역사적인 제3국 정상회담이 진행된 곳이 몇 곳 있다. 핀란드가 미-러 양국과 모두 원만한 관계를 갖고 ‘중립국’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적 중립 이미지’는 필수다. 서로 갈등하는 국가의 정상이 만날 때 만나는 장소를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야 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고려 요소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12일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났던 싱가포르는 양국 모두와 국교를 맺고 있다. 2015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당시 대만 총통이 ‘양안 분단’ 이후 66년 만에 처음 만난 곳도 싱가포르다.

유영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싱가포르는 정치적으로 어느 진영에도 기울어져 있지 않고, 동남아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상징성이 있다”며 “앞으로도 미국과 중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돼 있는 이슈를 다루기에 가장 좋은 나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중립국 이미지가 강한 나라 중 단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세계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곳들도 있다.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가 대표적이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도 가장 분쟁이 심각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첫 평화 협정이 1993년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체결됐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은 ‘오슬로 협정’을 통해 ‘평화 공존 지향’과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 출범’에 합의했다.

양측이 오슬로를 택한 것은 비밀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보안 유지 필요성이 주요 요소였다. 성일광 건국대 중동연구소 연구원은 “양측 고위 인사들이 변방 이미지가 강하고, 휴양지에 가듯 움직일 수 있는 오슬로를 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며 “노르웨이 정부도 비밀 협상이 이뤄지도록 적극 협력했다”고 말했다. 당시 회담에 대해 이스라엘과 아랍 모두 보수 진영에서 평화 협정에 대한 반발이 커 보안 유지가 중요했다.

아이슬란드는 1986년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 정상회담으로 ‘냉전 붕괴 및 평화’의 이정표가 됐다. 이곳에서 탈냉전기 주요 군축 논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이 다른 국가 정상들의 회담 장소로 활용된 적도 있다. 1978년 캠프데이비드 회의가 대표적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만났다. 이때 체결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의 첫 번째 평화 협정으로 사다트와 베긴은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국제정치사 전문가들은 제3국 정상회담이 열리는 국가의 특징 혹은 조건으로 중립국 이미지는 필수이고 안전, 우수한 교통 통신 인프라, 영어 사용 역량 등을 꼽는다.

주성재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는 “경호, 언어, 인프라의 편의성은 정상회담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요소”라며 “제3국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은 자국이 아닌 장소라 안전, 통신, 이동 편리성 등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따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홍보 효과 큰 정상회담 유치전도

싱가포르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숙소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133억 원을 ‘쾌척’했지만 6000억 원 이상의 홍보 효과를 거뒀다는 분석이 나왔다. 주요 정상회담 유치는 자국 국가 브랜드를 국제사회에서 높여 물밑 유치전도 뜨겁다.

외교부 관계자는 “규모가 작은 나라에 정상회담 유치는 가장 쉽게 국제사회에서 긍정적인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라며 “회담 과정에서의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는 어려워도 어느 정도 중재나 조율 업무도 담당할 수 있는 등 외교 역량을 키우는 계기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광산업 활성화 같은 경제적 효과도 있다. 이훈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거쳐 간 모든 곳은 앞으로 많은 스토리텔링이 이뤄지는 장소가 될 것”이라며 “싱가포르는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강조할 수 있는 홍보 소재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도 정상회담 유치에 좋은 조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도 앞으로 제3의 정상회담 장소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아픔 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고, 끊임없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치안이 좋고 정보기술(IT), 교통, 숙박, 회의 인프라가 뛰어난 것도 장점이다.

특히 ‘마지막 냉전’의 상징인 판문점은 남북한 사이에 평화가 정착되고, 나아가 통일이 될 경우 세계적인 정상회담 장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평가도 많다. 전쟁과 분단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현장으로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보다 훨씬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분석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두 차례나 만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한 장소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한국이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 중인 미국과 중국 모두와 우호적인 것도 미중 등 국가의 정상회담 장소로 떠오를 수 있는 이유로 꼽힌다. 최재헌 건국대 지리학과 교수는 “중국과 러시아로 대표되는 대륙 세력과 미국이 주도하는 해양 세력이 만나는 지점이란 지정학적 특성도 한국에서 향후 정상회담 등 다양한 국가 간 회의가 열릴 수 있는 요소”라고 말했다.

경제성장에 관심이 많은 개발도상국의 정상들이 참여하는 국제회의 혹은 정상회담을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여는 것도 의미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에 주재하는 한 개도국의 외교관은 “한국의 발전 경험이 개도국들에 많이 알려져 있는 만큼 한국이 개도국 경제와 관련된 정상회담을 적극 유치하면 국제사회에서 더욱 화제가 되고, 위상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정상회담#중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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